“지난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에 대한 평가는 단순히 교섭의 결과물인 협정뿐 아니라 교섭 당시의 정황과 여건 등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뤄져야 합니다. 청구권협정은 결코 완전한 것이라고 할 수 없지만 한국 외교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성과물로 인정받고 재평가돼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유의상(57·사진) 동북아역사재단 국제표기명칭대사는 지난 29일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강조했다. 유 대사는 최근 1951년 10월부터 1965년 6월까지 13년8개월간 진행된 한일회담 과정을 양국 외교문서 분석 등을 통해 정리한 책 ‘대일 외교의 명분과 실리: 대일 청구권 교섭 과정의 복원(역사공간)’을 펴냈다. 1981년 외무고시 15회로 외교부에 들어온 뒤 두 차례에 걸쳐 총 6년간 일본 주재 한국대사관에 근무했고 본부에서도 일본을 담당하는 동북아1과장을 지낸 일본 전문가다.
534쪽에 달하는 이 책은 1945년 8·15 광복 후 한국에서 대일 배상 요구 움직임이 일어나고 미국의 주선으로 한일회담이 열려 청구권 교섭이 진행되고 협정이 체결되기까지의 과정을 담았다. 또 이를 토대로 청구권협정에 대한 재평가와 남은 현안들에 대한 대처 방안도 제시했다.
유 대사는 “한일회담이 시작된 배경이나 교섭 상대국이었던 일본의 과거 역사에 대한 인식과 태도, 교섭 과정에서의 미국의 관여, 한국의 빈약한 외교 인프라, 경제 발전 등 당시의 시대적 요구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 외교관들이 마지막까지 개인 청구권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 점, 제1차 한일회담에서 우리 측이 기선제압을 위해 영어로 회담하자고 제안한 점, 교섭에 미온적이었던 일본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기 위해 ‘평화선’을 선포하며 레버리지로 활용한 점 등을 높이 평가했다.
유 대사는 또 “한국은 법적 근거와 사실 증거를 통해 청구권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청구권협정을 배상이 아닌 경제협력 방식으로 해결하는 타협을 이룰 수밖에 없었다”면서 “그럼에도 명칭에 청구권이라는 표현을 명기함으로써 청구권 문제의 해결이 과거를 청산한다는 의미가 있음을 분명히 했다”고 분석했다.
한일 위안부 합의안이 50년 전에 체결된 한일 청구권협정과 여러 면에서 유사하지만, 어렵게 합의에 이르렀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며 성실히 이행되어야 한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위안부 합의는 최종적 및 불가역적 해결을 확인한 점이나, 미국의 직·간접적 중재로 양국이 협상에 나선 점 등에서 청구권 협정과 유사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유 대사는 특히 청구권협정이나 위안부 합의에서의 미국의 역할에 주목하면서 이 문제들이 단순히 한일 양자 관계의 문제를 넘어서 글로벌 지정학과 관련이 있다고 지적했다. 1965년 패전국 일본을 다시 부흥시켜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방공(防共) 지역통합 구상을 추진하던 미국이 50년 후에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아시아 재균형 정책을 펼치며 일본과 신(新)밀월관계를 형성하면서 한일 간 교섭을 중재했다는 것이다.
책을 처음 접하는 독자들은 방대한 분량에 지레 겁을 먹을지 모르지만 막상 책을 읽어가다 보면 페이지가 술술 넘어갈 정도로 읽기 쉽게 쓰였다. 수많은 참고문헌을 활용해 교섭 과정에서의 다양한 에피소드를 소개한 것도 특징이다.
/노희영기자 nevermind@sedaily.com, 사진=권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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