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비엔날레와 더불어 국내 양대 비엔날레로 꼽히며 비중 있는 현대미술제로 자리 잡은 부산비엔날레가 전시공간 문제로 난관에 부딪혔다. 지난 1981년에 시작한 ‘부산청년비엔날레’를 전신으로 2002년 첫회를 맞은 부산비엔날레는 전용 전시장을 확보한 광주비엔날레와 달리 부산시립미술관 외에는 활용할 수 있는 공간이 부족했다. 부산 시내 여러 곳을 전전하며 행사를 이어오던 부산비엔날레와 윤재갑 전시감독은 수영구 망미동 소재 공장 일부를 빌려 쓴 적이 있는 고려제강 측에 도움을 청했다. 다소 무리한 요청이었지만 홍영철 고려제강 회장이 용단을 내렸다. 홍 회장은 1963년부터 사용해오다 최근 창고 겸용으로 쓰고 있는 3,000평 규모의 수영공장 전체를 전시 중심의 복합문화공간으로 활용하기로 했다. 고려제강은 지난달 부산시 및 부산비엔날레와 이 같은 내용에 합의했다. 전체 설계는 국내외 활동이 왕성한 건축가 조병수씨가 맡았다. 화력발전소를 개조한 영국의 테이트모던 미술관, 옛 군수공장 지대를 예술특구로 바꾼 중국 베이징의 다산쯔798거리 등의 사례처럼 새로운 명소가 될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아트마케팅’에서 진일보한 예술과의 동행에 과감하게 투자하는 기업의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활발하다. 예술을 활용해 기업 이미지를 쇄신하고 브랜드 가치를 높이거나 소비심리를 자극하는 방식의 아트마케팅과 달리 이 같은 후원의 특징은 즉각적인 실익(實益)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술가와의 협업으로 포장이나 케이스를 눈길 끄는 디자인으로 바꾸거나 예술로 소비자 구매심리를 자극하는 것으로 매출을 끌어올리는 등 마케팅 수단으로 예술을 활용하는 것과는 분명히 다르다. 고려제강의 사례처럼 민간기업들이 전시장이나 공연장, 유력한 해외 네트워크, 교육과 홍보 시스템 등 정부도 선뜻 나서기 어려운 ‘예술계 인프라’ 구축에 발 벗고 나서는 모양새다.
묵묵한 동반자 후원의 사례로 조수호(1954~2006) 전 한진해운 회장의 호를 딴 ‘양현미술상’이 있다. 국내외 미술인을 대상으로 한 양현미술상 수상작가에게는 총 1억원의 상금과 수상 후 3년 이내 작가가 원하는 시기와 원하는 미술관을 택해 전시할 수 있는 후원이 주어진다. 이 같은 파격적인 지원 시스템은 해외에서도 유례가 드물다. 또 지난해 심사위원으로 크리스 더컨 당시 영국 테이트모던 관장, 애덤 와인버그 미국 휘트니미술관 관장을 위촉해 수상작가를 널리 알리는 동시에 작가들에게 쉽게 얻을 수 없는 네트워크 확보 기회를 제공했다. 양현미술상 역시 메세나 활동이 기업의 이윤과 직결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최은영 양현재단 이사장은 한국 미술계와 해외 미술계의 국제적 교류 기회를 주고 나아가 한국 미술가들에 대한 세계의 관심을 키워 한국 미술의 위상을 높이는 데 의의를 두고 양현미술상에 큰 애착을 보이고 있다.
현대자동차의 경우 블룸버그TV와 손잡고 연간 25명씩 미술가 75명의 삶과 작품세계를 조명하는 ‘브릴리언트 아이디어’라는 TV시리즈를 지난해부터 진행하고 있다. 편당 30분짜리 영상을 3년간 제작, 방송하는 것으로 한국계 미국 작가인 마이클 주 등 다양한 작가가 출연했다. 조원홍 현대자동차 부사장은 “세계적 미술관의 연 관람객은 500만명이지만 블룸버그TV 시청자는 연 3억명에 달한다”며 “뛰어난 예술가를 소개하고 알리는 데 효과가 클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또 현대자동차는 서울대 미술대학의 이순종 교수를 운영위원장으로 해 전 세계 미대생들이 온라인에서 선배 작가와 큐레이터·평론가 등 문화예술계 전문가의 멘토링을 받을 수 있는 ‘아트유니온’ 사이트를 개설했다. 프로젝트를 이끄는 이순종 교수는 “재능 있는 학생들이 최고의 전문가들로부터 일대일 지도를 받으며 작품을 발전시키는 새로운 미술교육 방법인 동시에 온라인을 통해 우리 작가들을 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기회”라고 밝혔다.
이처럼 현대차는 자동차와는 전혀 무관해 보이는 미술계를 위한 다양한 플랫폼 확보를 지원하고 있다. 현대자동차그룹의 경우 열악한 미디어아트를 후원하는 ‘VH어워드’를 제정해 지난달 박제성 작가에게 대상과 함께 작품 제작비 3,000만원 외에 상금 5,000만원을 추가 지급했다. 미디어아트의 선구자 백남준의 조국인 우리나라의 미술시장은 정작 미디어아트 작가들에게는 열악해 전시 기회가 부족한 것은 물론 아트페어와 옥션 등에서도 판로가 없는 실정이다.
현대차 아트디렉터인 이대형 브랜드커뮤니케이션팀 차장은 “예술의 가치는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그 혜택을 나눌 수 있어야 하는 것인데 그 가치는 상업성과 별개로 혁신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아이디어를 통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과 감동의 영향력을 미치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예술과의 협업이 제품과 브랜드를 홍보하는 수단이었지만 이제는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투자가 필요하고 마케팅이 아닌 철학을, 전략이 아닌 인간과 가치를 이야기할 필요가 있고 우리의 숙제는 다가올 미래와의 소통”이라고 강조했다.
빗대 말하자면 그간 자기계발서와 실용서를 탐독하던 사람이 인문학 서적으로 눈을 돌려 더 큰 미래를 내다볼 혜안을 얻는 것처럼 기업들도 눈앞의 이익과 반응이 아닌 근본적이고 장기적인 비전을 세워가고 있다고 하겠다.
기업 입장에서는 ‘퍼주기식’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예술적 토양이 마련되고 국격이 오르면 한국 기업의 위상도 동반 상승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쇼팽콩쿠르 우승자인 피아니스트 조성진은 금호그룹이 후원하는 ‘금호영재콘서트’를 통해 11세에 데뷔했다. 금호그룹은 기업의 재정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메세나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해태제과의 국악 후원, 한국베링거인겔하임의 한빛문화재단이 운영하는 화정박물관처럼 우리 전통문화 지킴이도 있다.
미술평론가인 정준모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은 “우리나라가 1인당 국민소득 3만달러, 4만달러 시대로 가려면 기업도 ‘인문화’ 과정이 필요하다”며 “예술로 매출을 늘리려는 아트마케팅에서 벗어나 세계적인 기업의 규모와 위상에 맞는 문화예술 활동과 지원에는 전문성과 지속성이 전제돼야 한다”고 당부했다.
/조상인기자 ccsi@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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