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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십자각] 99년 공무원의 자화상
입력1999-04-16 00:00:00
수정
1999.04.16 00:00:00
얼마전 평소 친분이 있는 어느 부처의 A국장과 점심을 같이 했다. 국장과 기자간의 대화에서 대개 나타나는 얘기들이 그 자리에서도 나왔다. 처음엔 해당부처의 정책 현안에 대한 생각을 서로 나누는 것으로 고상하게(?) 시작한다.그 다음엔 화제가 정부 하는 일, 나라 돌아가는 꼴로 상승하다가 「O양 비디오」 같은 시중의 말초적인 얘기들로 뚝 떨어지기도 했다. 더 이상 갈 데 없는 대화가 이르는 종착점은 결국 「먹고 사는」 얘기였다.
A국장의 목소리는 그 대목에서 한탄조로 변했다. 최근 겪은 일을 그는 털어놓았다. 그는 부인과 심한 말다툼을 벌였다. 그의 부인이 일자리를 구하러 나서겠다고 하길래 말리느라고 그랬다는 것이다. A국장은 자부심이 강한 편. 『명색이 중앙부처 국장인데 차마 생활 때문에 부인이 일을 하도록 할 순 없었다.』 그는 그렇게 말했다. 고위 공무원이라면 「집사람이 돈을 버는」 오해 살 짓은 처음부터 하지 말아야 한다는 「집안단속론」도 그는 덧붙였다.
시시콜콜 따져 물어보지 않아도 대충 속사정은 짐작이 갔다. IMF의 잿빛 겨울이 길어진 동안 봉급은 줄고, 물가가 떨어진 것도 아니고,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최소한의 사교육이라도 시키려면 봉급생활이 쉽진 않으리라.
그래서 기자는 넌지시 물어 봤다. 그는 솔직했다. 『연봉제로 바뀐 뒤 이것저것 떼면 실수령액이 한달 이백이삼십 정도야.』 기자는 1초도 안걸려 『진짜냐』고 반문했다. 그렇게 적은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뒤이어 220만~230만원이 정말 적은 것인지 혼란스러워졌다. 대기업 대리가 그 만큼 받을 것이라는 생각도 겹쳤다. 물론 기자의 처지도 일순 오버랩 됐다.
많은가, 적은가를 머리 굴리며 혼자 따지는 동안에도 A국장의 말은 계속됐다. 『나는 참을만 해. 그러나 하위직들은 생계를 위협받을 정도로 심각해. 특히 고시를 거쳐 들어온 젊은 사무관들 사이에선 공무원 신분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들이 갈수록 커지는게 문제야. 10년, 20년 공무원 생활 해서 올라가 봐야 도달하는게 겨우 나 정도 위치거든.』
지난 4월1일 만우절 어느 부처의 전자게시판에 누군가 장난삼아 「삭감된 체력단련비 250%가 부활된다」는 메시지를 올렸다. 순식간에 조회건수가 500건에 달했다. 500건이라면 한 부처 직원들이 아래 위 가리지 않고 거의 남김없이 봤다는 뜻이다. 공무원들이 생계문제에 얼마나 절박한 심정들을 갖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한국을 이끌어가는 중요한 축중 하나인 공무원들의 요즘 모습이다. 「돈」에 초연해질 수 없는 그들이다.
조합주택에 살며 자가용도 없고 버스 타고 다니는 B과장이 있다. 강직하다는 평이 그의 주변에선 자자하다. B과장은 어떻게 사는지에 대해 『묻지마』라며 한사코 말을 안했다. 대신 그는 『공무원의 처우가 열악하다는 현실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이 있다』며 말문을 열었다. 『정치인이건, 학자건, 심지어 최근 어느 장관의 경우도 그랬지만 공무원과 공직사회의 비효율과 무능력을 일단 신랄하게 비판하고 난타해야만 인기가 올라가는 것처럼 여기는 풍토가 정말 참기 어렵다』고 B과장은 목소리를 가늘게 떨었다. 『언론도 마찬가지 아니냐』고 그는 항의했다.
장·차관까지 못 올라가고, 수억원의 부정축재도 해보지 못한 보통의 공무원들. 그들은 오늘 자화상을 그릴 얼굴도 없어 보인다. 먹고사는데 힘겨워 「목숨」을 의식해야 하고 사회가 그들의 「존재 이유」를 험악하게 추궁하기 때문이다. JAYLEE@SED.CO.KR<이재권 산업부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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