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4월 10일자 황성신문은 조선 최고 갑부 이석영(李石榮) 선생이 친일파 민영휘(閔泳徽)와 한강 가에 있던 천일정(天一亭)을 둘러싼 소송에서 패소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 소송은 당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장안 갑부들끼리의 소송이었기 때문이다. 이석영 선생이 천일정의 재산적 가치 때문에 소송까지 한 것은 아니다. 민영휘는 고종 31년(1894) 전 형조참의 지석영이 “민영휘 때문에 난(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다”고 지목한 인물이다. 지석영이 또 ‘온 세상 사람들이 그의 살점을 씹어 먹으려 한다’면서 사형시켜야 한다고 주청한 탐관오리였다. 매천 황현은 ‘오하기문(梧下紀聞)’에서 ‘이때 사람들이 민씨 중에 세 도적이 있다고 했다’면서 그 중 한 명이 민영휘의 부친 민두호라고 언급했을 정도로 부자 탐관오리로도 유명했다. 반면 이조판서 이유승의 아들로 태어난 이석영 선생은 영의정을 지낸 친족 이유원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그의 재산을 물려받아 거부가 됐다. 이석영 선생은 또한 임란 명신(名臣)이었던 백사 이항복의 직계후손으로 정승과 판서가 즐비했던 삼한갑족(三韓甲族) 출신이었다. 이석영 선생은 30세 때 과거에 급제한 후 종2품까지 올라갔지만 구한말의 사학자 송상도가 ‘기려수필(騎驪隨筆)’에서 ‘공이 벼슬에서 크게 성취할 뜻이 없더니 마침내 사직하고 돌아와 은거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시국을 개탄하면서 벼슬을 사직했다.
재판 이후 두 사람의 행적은 더욱 극적으로 갈린다. 민영휘는 고종의 총애를 받아 계속 승진하다가 순종 때는 정1품까지 승진했다. 그러나 민영휘는 재빨리 일제로 말을 갈아탔다. ‘통감부문서’ 1909년 7월 26일자에 따르면 일본 왕가의 시조라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신봉하는 신궁봉경회(神宮奉敬會)의 고문이 됐다. 망국 후에는 일제로부터 자작의 작위와 막대한 은사금까지 챙겼다.
반면 이석영 선생은 동생 이회영과 함께 6형제 모두가 전 재산을 바쳐 독립운동에 나섰다. 1911년 초 이석영 선생 6형제가 마련한 자금은 40만원이었는데 2010년 쌀값 기준으로 600억원에 달하는 거금이었다. 이 집안에서 처분한 토지는 확인된 것만 726필지 882만2,644㎡(267만평)인데 대부분 지금의 서울, 남양주, 양평, 파주 등지의 땅이다.
서울 명동의 2만6.446㎡(약 8,000평)은 망명 사실을 감추기 위해 처분하지 못하고 떠나서 조선총독부로 넘어갔다. 허성관 전 행정자치부 장관은 저서 ‘이석영 선생의 독립투쟁과 고뇌’에서 이 땅의 공시지가가 대략 1조원이며 시가로는 6조원이 넘을 것이라고 추산했다.
이석영 선생의 이 재산은 초기 한국독립운동의 기틀을 잡는데 결정적인 재원이 됐다. 망국 이듬해인 1911년 봄 전국 각지에서 모인 망명객들은 만주의 유하현 삼원보 근처 대고산에서 노천 군중대회를 열고 교민자치조직인 경학사(耕學社)와 신흥무관학교를 건립했는데 신흥무관학교의 건립 및 운영자금 상당수는 이석영 선생의 재산이었다. 신흥무관학교는 폐교될 때까지 약 3,500여명의 장교를 길러내는데 1920년의 봉오동, 청산리 승첩은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중견장교로서 활약했기에 일제 정규군과 정면에서 싸워 대파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독립운동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여서 이석영 선생은 막대한 자산을 모두 소진하고 유하현에서 심양, 북경, 천진, 상해 지역 등으로 방랑하면서 곤궁한 삶을 이어가야 했다. 결국 이석영 선생은 1934년 2월 28일 상해에서 사망해 홍교(虹橋)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반면 민영휘는 1912년 8월 이른바 한국병합기념장을 받고 한일은행장(훗날 동일은행)을 역임했는데 김을한은 일제강점기 대중잡지인 ‘삼천리’1931년 2월호의 ‘조선 최대 재벌 해부 3’에서 “현하(現下) 조선 제일의 갑부는 민영휘”라고 기록했다. 현재 한국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 가운데 정당하지 못한 부(富)축적에 대한 불신이 가장 크다고 볼 수 있다. 이제라도 전 재산을 나라에 희사한 이석영 선생의 애국정신을 재조명하고 드높이는 것이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는 기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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