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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 경쟁이 발전의 승패를 좌우한다는 의식이 팽배하던 2000년 느리게 사는 삶에도 가치가 있음을 일깨워주며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로 등극했던 프랑스 사회철학자 피에르 상소의 책 '느리게 사는 것의 의미'가 최근 국내에서 재출간됐다. 모두가 한 방향을 향해 바쁘게 달려갈 때 '자신에게 맞는 속도를 찾고 영혼을 숨쉬게 하라'는 그 책의 메시지는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끌어냈고 슬로시티·슬로푸드 등 사회 분위기 형성에 도움을 줬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는 지금도 그 '느림의 미학'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여전히 가장 빠른 속도가 가장 빠른 발전을 가져올 것이라는 로망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다. 속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되짚어보자면 '눈뜨고 코 베인다'는 서울에서 '빠름'의 대명사는 서울역이 아니었나 싶다. 1920년대 유럽건축 양식으로 지어 올린 서울역은 우아한 건물과는 달리 그야말로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치열하고 복잡한 장소였다. 고향으로 향하는 사람들은 기차 시간을 맞추기 위해 플랫폼을 향해 바삐 달렸고, 전차는 역 앞에 쉴 새 없이 사람들을 토해냈으며, 상경한 사람들도 개찰구를 빠져나오며 지체 없이 새로운 꿈과 삶을 향해 잰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수십년간 숨차게 역동 치던 서울의 심장, 서울역이 이제는 사람들에게 쉬어가라고 말하고 있다. 신역사가 완성되면서 철도역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구 서울역사는 2011년 원형을 복원했고 '문화역서울 284'라는 새로운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전시·공연·컨퍼런스 등 다양한 문화행사를 개최하고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열린 공간으로 새로운 전환기를 맞고 있다.
가장 빠르게 흘러가던 이곳이 이제는 시간을 머무르게 하고 잠시 숨을 고르게 하는 장소가 됐다. 오래전 수많은 사람들이 발을 딛고 섰을 매표소, 긴 의자들이 빽빽이 놓여 있었을 대합실에는 다양한 작품들이 전시됐다. 공간을 채운 음악을 들으며 도슨트의 설명에 따라 느린 걸음을 걸으면 그만이다. 여가를 주제로 '여행, 산책, 휴식, 책과 상상' 등을 표현한 다양한 전시와 퍼포먼스, 참여 프로그램 등을 펼친 '여가의 기술'이 얼마 전 진행되기도 했다. 공간에 머물러야 비로소 전시의 참맛을 알 수 있는 기회였기에 이 공간을 더욱 잘 설명하는 이벤트였다.
얼마 전 지인이 LP를 한 장 선물하며 올해는 다시 아날로그 레코드 앨범이 유행이라고 했다. 터치 몇 번이면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시대에 LP라니! 커다란 판을 꺼내 턴테이블을 열어 판을 끼워 넣고 원하는 곡을 듣기 위해 LP를 바꾸어 끼우거나 다음 곡이 나오기까지 한참을 기다려야 하는 과정은 분명 번거롭기 그지없다. 그러나 지난해 LP 판매량이 다섯 배나 증가하고 신구세대 가수 할 것 없이 잇따라 LP를 발매하고 있다는 점은 그 번거로움을 감수하더라도 얻을 수 있는 '느림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이야기다. 가끔은 느릿느릿 가는 것이,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것이 더 즐거울 때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최정철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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