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서운 한파와 잦은 폭설로 유난히 시리고 추운 겨울이다. 옛 선비들은 어떻게 모진 추위를 넘겼을까.
진경산수화의 대가인 겸재 정선에게 그림을 공부한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ㆍ1707~1769)은 조선 개국공신의 후손이었지만 평생 폐족의 멍에를 안고 산 불운한 화가였다. 조선의 아름다운 산천을 그리기보다는 세상을 향한 한과 원망을 예술로 승화시킨 시의성 강한 남종문인화풍의 그림으로 18세기 화단을 대표한다. 그의 작품 중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파교심매도'는 겨울이 다 가기 전에 봄을 맞이하고 싶은 선비의 심경이 잘 나타나 있다.
'눈 쌓인 산에서 매화꽃을 찾다.' 당나라 시인 맹호연이 파교를 건너 설산에서 매화를 찾아다녔다는 고사를 소재로 한 심사정의 이 그림은 산속에 겹겹이 눈이 쌓여 있고 앙상한 나뭇가지 위에도 소복이 눈이 쌓여 있어 봄이 아직 멀었음을 알 수 있는데도 나귀를 탄 선비는 매화꽃을 보려는 희망을 안고 의연히 산속으로 가고 있다. 매화꽃을 보기에는 아직 시기상조임을 아는지 모르는지 선비는 그저 꽃을 보고자 하는 꿈을 안고 유유히 간다. 설령 매화꽃을 보지 못하면 어떠하리. 선비에게 그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애당초 선비는 반드시 눈 속에서 매화꽃을 보리라는 기대보다는 잠시나마 혼탁한 세상으로부터 벗어나 맑고 정화된 세상에서 정신적 휴식을 취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가 찾고자 하는 설산에 핀 매화는 어떤 의미일까. 바로 선비가 지향하는 이상세계, 즉 현실에서 충족할 수 없는 높은 정신적 경지를 말한다. 답답하고 암울한 현실(혹독한 추위)을 벗어나 자신의 정신을 기탁할 대상(매화)인 것이다.
탐매여행의 진정한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소극적으로 방안에서 봄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직접 설산에 들어가 매화를 찾는 적극적인 행위로 겨울추위를 이기고 희망찬 봄을 맞겠다는 것이다.
추위를 이기는 선비들의 또 다른 유형은 매화꽃을 그리면서 겨울을 보내는 것이다. 바로 '구구소한도(九九消寒圖)'를 그리면서 봄을 기다리는 것인데 '구구'는 동지 다음날부터 81일간을 말하며 겨울 중 가장 추운 시기다. 옛 선비들은 '구구'를 상징하는 여든한 송이의 매화꽃을 하얀 종이에 그려 벽에 붙여놓고 하루에 한 송이씩 붉은 색을 칠하면서 겨울을 하루하루 떠나보냈다.
여든한 송이의 매화가 모두 붉은 매화로 피어나는 날은 경칩과 춘분의 중간인 3월10일경으로 공교롭게도 창밖에 매화나무에도 꽃이 피기 시작하는 시기이다. 바야흐로 '구구소한도'의 완성과 함께 추운 겨울은 물러가고 따뜻한 봄을 맞게 되는 것이다. 추위를 이기는 선비들의 멋과 지혜다.
매화는 결코 따뜻한 호시절에 피거나 다른 꽃들과 함께 피지 않는다. 차가운 추위를 이겨낸 강한 생명력으로 조그만 꽃 속에 영혼까지 스며드는 그윽한 향기를 품고 고고하게 피는 품격 높은 꽃이다. 매화는 높은 절개와 지조 등의 미학적 요소로 사군자ㆍ세한삼우(歲寒三友)중 하나가 됐고 군자ㆍ우국충정ㆍ다산(多産)의 상징으로 시인과 서화가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붉은 매화꽃을 그리면서 극한의 추위를 이겨내고 희망찬 봄날을 기다리던 옛 선비들의 멋과 지혜가 요즈음 새삼스레 그리워지는 것은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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