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이번 판결에 주목하는 것은 그것이 담고 있는 함의가 광범위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최근의 변화된 금융시장 환경과 소비자의 높아진 권리의식이 요구하고 있는 은행 혁신의 과제가 이번 판결의 근저에 깔려 있다고 봐야 한다. 과거 은행은 절대적 '갑'이었다. 고객의 예금을 받아 다른 고객에게 대출해주면서 적금이나 예금 가입을 강요하는 '꺾기'도 일반적이었다. 근저당 설정비는 아예 얘깃거리도 안 됐다. 당연히 대출자가 부담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시대가 변했다. 경제민주화 등 정치권의 압박도 거세지만 금융시장 환경 자체가 달라졌다. 기업들의 은행 돈 수요가 과거보다 많이 줄었다. 개인은 가계부채에 짓눌려 돈을 못 빌리거나 안 빌린다. 부동산 경기 침체로 부동산담보대출도 지지부진하다. 반면 은행은 돈이 많아 주체를 못한다. 만성적인 자금 초과수요가 초과공급으로 확실하게 바뀐 것이다. 그러니 더 이상 은행은 갑이 될 수 없다.
은행연합회가 지난 27일 의결한 '대출금리 모범규준'도 같은 맥락에 있다. 모범규준에 따르면 대출받은 사람이 취업, 승진, 전문자격증 취득 등의 변화요인이 생겼을 경우 대출금리 인하를 요구할 수 있다. 2002년에 도입했지만 유명무실했던 이 제도를 은행권이 무게감을 실어 다시 부활시킨 것은 금융혁신에 대한 사회적 압박 때문이다.
사채금리 수준의 고금리를 받던 카드 리볼빙 결제제도 변경, 보험 약관대출 금리 인하, 자동차보험의 마일리지 보험제도 시행 등도 모두 이 같은 시장환경 변화의 산물이다.
이제 은행들은 과거 '갑'의 금융관행과 사고를 떨쳐내야 한다. '을'의 자세로 소비자에게 먼저 다가가는 금융회사가 경쟁에서 이기는 시대가 본격화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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