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이하 현지시간) 슈피겔은 "감청 문제를 집중 성토하려 했던 유럽연합(EU) 정상회의가 별다른 성과 없이 끝났다"며 "'외교적 딜레마'에 처한 독일이 미묘한 입장변화를 보이기 때문"이라고 보도했다.
로이터에 따르면 독일은 유엔에 과도한 스파이 행위 및 사생활 침해를 차단하는 '안티 스파이법'을 제안하고 시리아 해법 등의 비협조 가능성을 내비치는 등 공식적으로는 감청 파문에 대한 항의를 계속하고 있다.
그러나 25일까지 열린 EU 정상회의에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도청 파문을 미ㆍEU 자유무역협상(FTA) 연기로 연결하려는 일부 움직임을 차단하는 데 더 주력했다. 슈피겔에 따르면 메르켈 총리는 "미ㆍEU FTA의 중요성은 전보다 더 커졌다. (방해하려는) 국가들은 결과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며 관련 논의에 일절 응하지 않았다.
EU 정상들은 본회의 통과만을 남겨놓았던 EU의 '개인정보보호법 개정안'도 오는 2015년 이후로 시행을 연기했다. 이 법은 구글ㆍ페이스북 등 미 기업들이 EU 당국의 허가 없이 사생활 정보를 유출할 경우 최대 1억유로의 벌금을 부과할 수 있도록 한 것이 주요 내용으로 도청파문이 불거진 뒤 통과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피해 당사자인 메르켈 총리가 예상과 달리 개정안 처리에 적극성을 보이지 않음에 따라 기류가 급변해 법안시행에 반대해온 영국의 주장에 힘이 실리게 됐다. 미 정부나 기업들의 반대를 감안할 때 향후 시행 여부조차 미지수라는 게 EU 관계자들의 견해다.
이런 가운데 파이낸셜타임스(FT)는 메르켈 총리가 이번 도청파문을 계기로 미국과의 정보공유 단계를 한 계단 더 격상시키기 위해 물밑교섭에 나서고 있다고 보도했다. FT는 "독일은 이른바 '5개의 눈'이 아니다"라고 말한 메르켈 총리의 정상회의 발언을 전하며 독일의 목적 가운데 하나가 미국과의 정보공유 수위를 한 단계 더 격상시키는 새 협정이라고 전했다. 5개의 눈이란 미국과 영국ㆍ캐나다ㆍ호주ㆍ뉴질랜드의 정보공유협정(FVEY)을 일컫는 말로 이들은 상대국이 캐낸 첩보를 공유하는 특별협약을 맺고 있다.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독일은 1년 전부터 협정참여 의사를 타진해왔으나 워싱턴의 거부로 성사되지 못했다.
정치권이 미묘한 기류변화를 보이기 시작한 것과는 달리 미 국가안보국(NSA)발 도청파문은 갈수록 확산되고 있다. 26일 슈피겔도 별도의 기사에서 NSA가 메르켈 총리의 휴대폰을 지난 2002년부터 10년 이상 장기간 감청해왔다고 보도했다. 슈피겔이 입수한 기밀문서에 따르면 NSA와 미 중앙정보부(CIA)는 파리ㆍ로마ㆍ제네바 등 80여개 지역에 무단감청 시설을 설치, 운영하고 있다. 26일 워싱턴 중심가에서는 수천명의 시민이 운집한 가운데 첩보기관의 감청행위를 비난하는 시위가 열렸다. 시위대는 "정부가 미국의 수정헌법을 위반했다"며 "스파이 행위를 즉각 중단하라"고 항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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