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26일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미국 방문을 계기로 미일관계가 새로운 분기점을 맞는다. 전후 70주년에 때맞춰 이뤄지는 아베 총리의 이번 방미를 기점으로 양국 관계는 안보와 경제 면에서 이전과는 다른 수준의 긴밀한 동맹관계로 격상될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 외교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는 사이 미국이 일본과의 유대관계를 노골적으로 강화하고 나섬에 따라 한미일 삼각공조의 틀에서 한국의 입지가 크게 약화하고 자칫 동북아에서 외교적으로 고립될 우려도 커지고 있다.
6박 8일간의 이번 방미 기간 중 양국은 1997년 이래 18년 만에 미일 방위협력지침(가이드라인) 개정에 합의해 안보동맹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된다. 수년간 교착상태에 빠졌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교섭에서도 큰 진전이 예상되는 가운데 양국 정상의 막판 정치적 타결 가능성도 남아 있는 상태다. 취임 후 줄곧 미일관계 강화에 공을 들여온 아베 총리는 과거사 문제를 둘러싸고 미 정계에서 고조되는 논란에도 불구, 백악관의 국빈 대접을 받으며 일본 총리로는 최초의 미 의회 합동연설을 성사시키는 등 가시적인 외교적 성과를 올리게 됐다.
◇세 마리 토끼 노리는 아베=미국의소리(VOA) 방송은 26일부터 5월3일로 예정된 아베 총리의 방미가 양국 동맹관계를 새로운 국면으로 이끄는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고 23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안보나 경제 면에서 미국의 패권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는 중국에 맞서기 위해 미국은 이번 아베 총리의 방미 기간 중 내심 못마땅한 아베 정권의 과거사 인식 문제를 묻어둔 채 일본의 국제적 역할에 한층 힘을 실어줄 것으로 보인다. 또 일본은 이번 총리 방미를 미국 주도의 안보·경제질서에 힘을 보태 중국을 견제하는 한편 경제적 실리와 '보통국가' 실현, 과거사 문제 돌파라는 세 마리를 토끼를 잡을 기회로 삼겠다는 야심을 보이고 있다.
이 같은 이해관계와 종전 70년이라는 역사적 타이밍이 맞물려 미일 양국은 과거 어느 때보다 강력한 경제 파트너이자 안보 동맹국으로서의 공조를 다질 것으로 예상된다. 전후 70년간 일본 총리에게 좀처럼 문을 열어주지 않았던 미 의회가 29일 아베 총리에게 처음으로 상·하원 합동연설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도 이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미국 아시아정책연구소(NBR)의 메레디스 밀러 애널리스트는 "미국은 중국뿐 아니라 아시아와 일본에도 미국이 동맹국을 중시한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보내기를 원한다"고 분석했다.
◇TPP, 극적 타결 이뤄질 수도=우선 이번 방미 일정에서 최대 관심사는 28일로 예정된 미일 정상회담에서 TPP 협상에 관해 얼마나 큰 진전이 이뤄질지에 쏠려 있다. 지난달 중국이 주도하는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으로 회원국 가입 신청이 몰리면서 미국의 금융 패권에 위협을 느낀 오바마 정권은 TPP에 부쩍 속도를 내고 있다. AIIB 미 가입국인 일본과 손잡고 TPP를 조속히 타결함으로써 국제 교역질서에서 미국의 입지를 강화하고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다. TPP 타결의 디딤돌이 될 무역협상촉진권한(TPA) 법안도 상원에 이어 이날 하원 상임위를 통과하는 등 TPP 교섭 합의 분위기는 미일 정상회담을 앞두고 한창 무르익어가고 있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양국이 완전한 합의에 도달하기는 어려울 가능성이 크다. 앞서 월스트리트저널(WSJ)과의 인터뷰에서 아베 총리는 "(미일) TPP 협상이 타결에 근접해가고 있다"면서도 "산을 오를 때 마지막 단계가 가장 어렵다"며 쌀과 자동차 등 민감 이슈를 놓고 막판 진통이 있음을 시사하기도 했다. 하지만 "협상이 9부 능선을 넘었다"는 관계자들의 말대로 TPP 타결을 위한 가장 큰 고비인 미일 협상이 거의 막바지에 이른 만큼 양국 정상 간 공동성명은 협상의 진척 상황에 대한 고무적인 평가를 담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미일 이해관계 맞아떨어진 안보동맹 강화=아직 유동적인 TPP 협상과 달리 안보 면에서는 27일 열리는 양국의 외교·국방장관 연석회의(2+2)에서 새 미일 방위협력지침(가이드라인) 합의 발표가 예고돼 있다. 1997년 이후 18년 만에 나오는 새 가이드라인은 한미 연합사령부 같은 미군과 자위대 간 상시 협의체 창설, 무력충돌 사태(유사시)와 평시의 중간 단계인 '회색지대 사태'에서의 미일공조 등의 내용을 포함하는 것으로 미군과 일본 자위대의 협력이 양적·질적으로 크게 확대될 것으로 알려졌다. 24일 마이니치신문은 새 가이드라인에 미국으로 향하는 탄도미사일을 일본이 요격하는 구상을 명기할 것이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미국 입장에서 이러한 안보동맹 업그레이드는 동아시아 안보질서 유지를 위한 '대리인'으로서 일본의 군사력을 활용해 자국의 군비 부담을 덜면서 중국의 해양진출을 견제하려는 노림수를 담고 있다. 지난 1980년대 나카소네 야스히로 당시 일본 총리가 일본을 태평양에서의 미국의 "불침항모(가라앉지 않는 항공모함)"라고 표현했듯이 미국은 이번 동맹 강화를 통해 자위대를 미군처럼 활용할 수 있는 길을 연 셈이다.
아베 정권 입장에서는 이번 가이드라인 개정이 갖는 의미가 더욱 크다. 미국과의 공고해진 관계를 과시해 동중국해에서 중국에 대한 억지력을 강화하는 것은 물론 일본의 '보통국가화'와 '전후체제(2차대전 패전으로 이뤄진 평화헌법 체제) 탈피'를 위한 발판을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아베 총리는 집단자위권 행사를 용인하고 국회 승인 하에 해외 파병을 허용하기로 하는 등 군사력 확대를 위한 국내 법제화 진행에 속도를 내고 있다. 미일동맹 강화를 위한 가이드라인 개정은 패권국인 미국의 뒷받침을 받아 일본이 '전쟁하는 군사강국'으로 본격 탈바꿈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우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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