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연방준비제도(Fedㆍ연준)의 출구전략에 대한 우려가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 재정위기의 망령을 다시 일깨우고 있다. 유로존이 경기침체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금융시장을 강타한 '버냉키 쇼크'의 여파로 스페인ㆍ이탈리아 등 재정이 취약한 남유럽 국가들의 국채금리가 급등하면서 재정위기 재연에 대한 우려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금융계에서는 올해 안에 이탈리아가 유럽연합(EU)에 구제금융을 요청할 것이라는 비관적인 관측마저 나오고 있다.
24일(현지시간)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에 따르면 이탈리아 2위 은행인 메디오방카는 고객들에게 보낸 기밀 보고서에서 "세계 채권시장이 급락하며 이탈리아의 부도위험지수가 이미 경고신호를 보내고 있다"며 "차입비용이 낮아지고 경제가 회복되지 않는다면 이탈리아는 6개월 내 EU에 구제금융을 신청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탈리아는 나랏빚이 2조1,000억유로에 달하는 세계 3위의 부채국으로 채권시장이 흔들리고 국채금리가 오르면(국채 값 하락) 곧바로 재정위기 우려가 불거질 수밖에 없다. 실제로 24일 이탈리아의 10년 만기 국채금리는 4.825%를 기록해 지난 19일 벤 버냉키 연준 의장이 미국의 출구전략을 기정사실화하면서 글로벌 유동성에 경고등이 켜지 뒤 3거래일 만에 0.572%포인트나 급등했다. 시장에서 미국의 출구전략 논란이 불거진 지난달 초보다는 무려 1%포인트 이상 높아졌다.
벤치마크가 되는 국채수익률이 오르면 기업이 발행하는 회사채 수익률도 급등해 기업들이 자금경색에 시달리게 된다. 메디오방카의 안토니오 구글리엘미 애널리스트는 보고서에서 "거시경제가 나아지지 않은 상태에서 현재 160여개 대기업들이 비상 위기관리 체제에 있다"며 이탈리아의 경제위기 가능성을 경고했다.
사정은 다른 남유럽 국가들도 마찬가지다. 이탈리아 못지않은 재정취약국인 스페인도 국채금리가 가파른 급등세를 타며 위기상황에 한발 더 다가섰다. 이날 스페인의 10년 만기 국채금리는 5.095%까지 올랐다. 지난달 초에 비하면 역시 1%포인트 이상 높은 수준이다.
이 밖에 그리스와 포르투갈 등 재정위기국들의 자금조달 여건도 빠르게 악화하고 있다. 그리스의 10년물 국채금리는 지난달 22일 버냉키 의장이 의회에서 출구전략을 언급하기 전까지만 해도 8% 수준에 머물렀지만 24일에는 11.225%로 치솟았다. 포르투갈 국채금리도 6.679%로 올라섰다.
유로존 국가들의 국채금리는 재정위기에 대한 불안감이 최고조에 달했던 지난해에 비하면 아직은 낮은 수준이다. 스페인의 경우 재정난 우려가 극에 달했던 지난해 7월(7.75%)보다는 2%포인트 이상 낮은 금리에 머물고 있다. 하지만 각국이 유동성을 대거 풀던 지난해와 달리 글로벌 유동성이 위축되는 시점이라는 점에서 유로존의 재정난과 경제위기 재연 가능성에 대한 경각심은 빠르게 고조되고 있다.
게다가 유로존은 지속되는 경기침체로 경제체질이 약해질 대로 약해진 상태다. 1ㆍ4분기 유로존 국내총생산(GDP)은 전분기 대비 0.2% 감소해 6분기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이어가고 있다. 텔레그래프는 명목 GDP가 위축되는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자금조달 비용이 5%에 달하면 경제가 심각한 위기에 빠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게다가 지난해 위기진화를 위해 "무슨 일이든 하겠다"는 약속으로 국채시장을 진정시켰던 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의 '약발'도 예전 같지 않다. 드리가 총재는 18일 시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유로존 경기를 위해 뭐든 할 준비가 돼 있다"고 구두개입에 나섰지만 행동이 따르지 않는 그의 발언에 시장은 아무런 반응도 나타내지 않았다.
파이낸셜타임스(FT) 는 악사인베스트먼트매니저스의 채권 부문 최고투자담당자(CIO)인 크리스토퍼 이고를 인용해 "미 연준의 양적완화 축소 방침으로 금리상승이 지속되면 유로존 위기가 재연될 수 있다"며 "최악의 상황을 피하려면 ECB가 글로벌 금리상승에 대응할 수 있는 창조적인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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