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중순 대법원에서 의미 있는 판결이 나왔다. 부인을 흉기로 위협해 강제로 성관계를 맺은 혐의(특수강간 등)로 기소된 A(45) 씨의 상고심에서 대법원이 징역 3년6월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 부부 강간죄를 인정한 것이다. 특히 이달부터 관련 법이 개정되면서 친족 강간의 대상에 배우자도 포함됨에 따라 부부 강간을 가중처벌하게 됐다.
최근 변화의 조짐이 엿보이고 있지만 여성들은 여전히 갈 길이 멀다고 입을 모은다. 세계적 권위의 인류학자(프랑수아즈 에리티에), 철학자(실비안 아가생스키), 역사학자(미셸 페로)가 프랑스의 정치학자 니콜 바샤랑과 대담을 통해 여성은 어떤 존재이고, 왜 '제2의 성'이 되었으며, 여성이 현재와 같은 지위를 얻기 위해 어떤 희생을 치렀는지를 상세하게 소개한다.
저자들에 따르면, 오랜 세월 여성은 남성이 세상을 존속하게 하는 데 필요한 도구에 불과했다.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참정권을 얻은 것도 미국(1920년), 영국(1928년), 프랑스(1946년), 스위스(1971년)로 100년도 안 된다. 그렇다면 이렇게 불평등한 관계가 지속된 이유는 무엇일까. 대담자들은 여성이 약하고 어리석고 믿을 수 없는 반면 남성은 강하고 이성적이며 용감하다는 믿음이 사회를 지배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이것은 사실과 상관 없는 문화적 신념일 뿐이다. 대표적으로 아기가 어떻게 태어나는지를 알려주는 부모들의 태도에서 이런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아빠가 씨앗을 엄마 배에 심었고 그 씨앗이 자라서 어느 날 아기가 엄마 배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설명은 언뜻 보면 대수롭지 않은 것 같지만, 남성의 여성 지배의 원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문화적 신념이라는 것이다. 즉 원시 사회에서 그랬듯 여자는 남자가 일정 기간 자신의 씨앗을 심어 놓는 밭에 불과하다는 생각이다.
세계적인 인류학자인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수제자인 프랑수아즈 에리티에는 여성들이 종속적 상태에 놓이게 된 원초적 시점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새 생명을 잉태하고 세상에 내놓는 여성들이 왜 '제2의 성'이 됐는지, 남성들이 자신의 후손을 생산하는 여성의 배를 어떻게 조종했는지, 여성의 본성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지 다양한 관점에서 살펴본다. 역사가 페로는 여성이 교육받고 스스로 직업을 선택하고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 참정권을 획득하기 위해, 출산을 결정할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치렀던 투쟁의 역사를 돌아본다.
저자들은 "여성이 스스로 자기 운명을 결정하고, 권리를 보호하며, 여성이 온전한 '인간'으로 존재하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은 오로지 여성 자신의 손에 달려 있다"고 강조한다. 1만 8,000원.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