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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투자자들이 원자재 시장으로 몰려 들고 있다. 그동안 원유, 금, 구리, 설탕 등 원자재는 세계 경제 침체로 인한 수요 감소와 미국 달러화 강세 등으로 가격이 폭락하면서 투자자들에게 외면받아 왔다. 하지만 최근 달러 강세가 주춤하고 유럽의 대규모 양적 완화와 중국이 지급준비율 인하 등 경기부양으로 원자재 수요가 늘고 가격이 상승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이에 따라 원자재 값도 올 들어 하락세를 멈추고 꿈틀거리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원유 등 24개 원자재 가격을 추종하는 스탠더드앤드푸어스 골드만삭스 상품지수(S&P GSCI)는 최근 한달 새 12%가량 올랐고, 하루 평군 거래대금이 지난 12월 이후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다. 지난해 6월부터 떨어지기 시작한 국제 원유(WTI) 가격은 지난달 배럴당 43.46달러로 저점을 찍은 후 한 달 새 30%나 상승했고, 구리 값도 3월 최저치 대비 6% 올랐다. 같은 기간 금 가격은 8%, 설탕은 4% 상승했다.
이러한 원자재 값 상승은 투자자금이 몰려들면서 더욱 탄력을 받고 있다. 원유 등 원자재 가격이 바닥을 찍은 것으로 판단, 점점 더 과감한 투자에 나서고 있다. 미국 상품선물거래위원회(CTFC)에 의하면 지난 8일부터 14일까지 한 주 동안 국제 유가 상승에 베팅한 투자자들이 전주에 비해 9%나 증가, 23만1,556건의 선물계약이 이뤄졌다. 이는 지난해 8월 이후 최고치다. 아울러 막대한 자금을 운용하는 펀드회사들도 3월 초부터 구리 등에 투자자금을 쏟아 붓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모닝스타에 따르면 3월 에너지 부문 원자재 관련 상장지수펀드(ETF)에 유입된 자금은 지난 2월에 비해 무려 40%나 급증했다.
원자재 투자가 늘어나는 것은 무엇보다도 달러 랠리가 일단 멈췄다는 안도감에 기인한다. 달러 가치가 하락하면 달러화로 표기된 원자재 값이 떨어지게 된다. 즉 달러 약세는 해외 원자재 수요를 늘려 가격 상승을 이끄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최근 미국의 경제지표 부진 등으로 지난달 연방준비제도(Fed·연준)는 기준금리 인상을 서두르지 않겠다는 신호를 보냈고, 달러는 랠리를 멈추고 숨 고르기에 들어갔다.
프랑수아 부르동 피에라캐피털 최고투자책임자(CIO)는 "원자재 가격은 바닥을 찍었고, 달러 랠리도 일단 멈췄다"며 "미국 경제 성장이 유럽과 일본 경제 회복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중국 경제 둔화 속도도 완화되면서 글로벌 경기 회복을 낙관할 수 있게 됐다"고 전망했다.
유럽과 일본 등에서 경기 개선 조짐이 나타나고 있는 것도 원자재 투자를 부추기고 있다.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 경제는 유럽중앙은행(ECB)의 대규모 양적 완화에 힘입어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이에 전문가들은 중국에 이어 두번째로 큰 원자재 소비지역인 유럽의 경기 회복이 원자재 수요 증가는 물론, 가격 상승을 이끌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미국 경제도 더디긴 하지만 꾸준히 회복세를 타고 있고, 중국도 경기 둔화를 방치하지 않고 적극적인 경기 부양에 나설 것이라는 기대감도 한 몫 거들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유동 자금이 넘치지만 마땅한 투자처가 없는 것도 원자재가 주목받는 이유다. 글로벌 증시가 꼭지점에 다다랐다는 경고가 잇따라 나오면서 주식에 투자하는 것을 망설이는 투자자들이 늘고 있다. 아울러 유럽과 아시아 지역의 채권 시장도 제로금리도 떨어지거나 심지어 마이너스 권으로 떨어져 투자처로 적합하지 않은 상황이다. 토털리턴펀드의 조지 지빅 오펜하이머 원자재전략 매니저는 "투자자들은 유럽중앙은행(ECB)이 경기부양 정책을 쓰고 미국이 성장세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이 원자재 투자 기회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직 원자재 투자가 시기상조라는 목소리도 크다. 유럽 경기가 살아나고 있긴 하지만, 그리스 위기 등 변수가 많고 회복세가 장기적으로 이어질 지는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중국이 향후 부양책을 확대할 것이라는 기대감은 있지만 그만큼 경기 둔화도 가시화되고 있어 원자재 수요가 크게 늘지 않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세계은행(WB)도 지난 22일 원자재 시장 보고서를 통해 올해 원자재 가격이 약세를 이어갈 것으로 예상했다. 지속되는 경기 위축과 공급 과잉으로 철광석은 올해 톤당 63달러로 떨어질 것으로 예측했으며 알루미늄, 구리, 니켈 가격 전망치도 일제히 하향 조정했다. UBS의 상품 애널리스트 지오바니 스타우노보는 "원자재 가격 바닥이 멀지는 않았지만 아직은 아닌 것 같다"면서 "여전히 불확실성이 높은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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