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연말 연시 보내라는 인사가 무색할 정도로, 사건사고가 많은 한 해의 마무리가 될 듯 하다. 얼마 전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외교 장관 회담 이후 한일 양국 간에 오가고 있는 설전(舌戰)에서부터, 서울시향 사태를 둘러싼 진실공방, 그리고 SK 집안의 문제 등 연속으로 안타까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언론인의 입장에서는 할 말이 많은 이야기들이지만 한 자연인의 입장에서는 모든 일들이 슬프고 처연한 사건들이다. ‘왜 우리는 지금 이 시대를 살아야 하는가’라는 장탄식이 들게 만드는 것이다.
얼마 전부터 나는 ‘한국인의 미움’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지금까지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작업이기도 하다. ‘한국인은 왜 이렇게 남을 이유 없이 미워하고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는 데 주저함이 없는가’에 대한 분석을 해 보고 있다. 떠나가 버린 사랑 이후 남겨진 자의 애잔함, 기대했던 만큼 이익을 돌려받지 않은 사람의 억한 심정, 만나서는 좋은 말 해놓고 뒤돌아서면 딴짓하는 기회주의에 대한 분노 같은 것들. 일련의 감정과 경험으로부터 누군가를 욕하거나 비난할 수는 있다. 문제는 그것을 삭이고 합리적으로 해결하기보다는 상처를 더 크게 키우고 사안을 확대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억울한 사연들을 법과 제도의 논리로 엄징(嚴懲)하기보다는 여론을 통해 주의를 환기하고 ‘집단 감성(collective sentiment)’을 도구화해 정치적 사건으로 만들어버린 케이스들에 너무 익숙하다. 문제 당사자들끼리 깊은 대화 내지는 적절한 수준의 가치 교환으로 해결하면 될 일들을 굳이 미디어를 통해 유포하고, 수많은 사람들의 분노를 또 다른 자원(resource)으로) 활용하는 사회는 희망이 없다. 우리는 ‘헌법 위에 존재하는 국민정서법’을 만들었고, 앞으로도 그것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을 혹독하게 치러야 할 듯 하다.
우리가 좀 더 희망을 가지려면, 모두를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미움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감정을 객관화하기 위한 도구가 필요한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미움 받을 용기’를 감수하는 것뿐만 아니라, ‘왜 미워하는 가’ 짚어 볼 용기가 필요하다. 내 안에 있는 일련의 화와 분노들을 꾸준히 관찰하고 직시하는 작업들이 이루어지고, 그 미움을 걷어가는 방법과 주체에 대한 고민이 끝나면, 서로간에 화해하기 위한 시스템도 마련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든다.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정치가이자 사상가인 공손앙이라는 사람이 있다. 상앙으로도 불리는 인물이다. 그는 법가 철학자로서 진(秦)을 위해 일평생 일하다가 귀족들의 모함으로 인해 억울하게 죽고 만 사람이기도 하다. 상앙은 진(秦)을 강대국으로 만든 주역이기도 하다. 그가 제일 먼저 ‘변법’(變法)을 통해 국가의 기틀을 다지면서 했던 작업 중 하나가 주민들 간에 폭력을 동원한 다툼을 금지하는 법이었다. 당시 진나라는 여러 부족과 마을로 쪼개져 걸핏하면 수로(水路)나 도로(道路)를 둘러 싼 싸움이 이루어졌다. 싸움 와중에 주민들이 죽기도 했다. 상앙은 상대방의 불법 행위에 대한 분노를 국유화하려 했다. 그리고 억울한 일이 있다는 빌미로 패싸움을 벌이는 자들을 과감하게 사형에 처하겠다고 선포했다. 실제로 716명에 이르는 사람들을 일거에 처형한 일도 있었다. 미움을 성숙한 방식으로 관리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법적 경고였던 셈이다.
공손앙의 철통 같은 법적 조치는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 안에 가득 찬 이 미움들을 해결할 방법을 체계적으로 모색하는 작업이 필요한 때다. 다행히 한국은 합리와 상식에 입각한 토론이 작동하는 사회라고 본다. 서로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축복하는 것 못지 않게, 복을 없애는 화(禍)를 제거할 만한 대책을 고민하는 한 해가 되길 빈다.
/김나영기자 iluvny23@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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