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3년 12월30일 미국 시카고 이로쿼이 극장. 뮤지컬 ‘푸른 수염의 사나이(Mr bluebeard)’ 제 2막이 시작된 오후 3시 15분, 무대 옆 커튼에 불이 붙었다. 극장 직원들은 급히 방화 셔터를 내렸으나 웬일인지 반만 작동하고 멈췄다. 불을 막기는커녕 불길을 옮기는 통로로 변한 방화벽을 타고 불은 관객이 몰려 있는 객석으로 번졌다.
순간 공포가 극장을 집어삼켰다. 관객들은 비상구를 향해 뛰쳐나갔다. 오케스트라가 관객을 안심시키기 위해 애써 연주를 시작했으나 시작과 동시에 불길에 휩싸인 무대장치가 굉음과 함께 무너져내렸다. 전기도 모두 나가 어두컴컴한 극장 안에서 화마가 악마의 혀처럼 2층 꼭대기 관객들을 집어삼켰다.
불길이 미치지 않은 1층에서도 대부분의 비상구가 열리지 않아 관객들이 깔려 죽는 아비규환의 사태가 벌어졌다. 극장 측이 공짜손님을 방지한다며 바깥에서 잠근 탓이다. 수익 극대화 욕심으로 1,715명 정원에 1,900여명을 입장시킨 상황. 비상구를 부수고 탈출한 사람들은 건물 밖으로 뛰어 내렸지만 겨울의 차가운 길바닥에 부딪혀 목숨을 잃었다.
화재 발생 15분만에 도착한 소방대가 불길을 잡았으나 이미 아비규환이 벌어진 후였다. 예상 외로 경미했던 화재 피해에 비해 인명피해는 상상을 초월했다. 불과 15분 동안 사망자가 575명. 대부분이 비상구 근처에서 깔려 죽었다. 서로 먼저 살겠다고 잠겨진 출입구를 향해 몰려 들었기에 인명 피해가 컸다. 병원에 후송된 부상자 27명도 목숨을 잃어 모두 602명이 죽었다.
마침 방학을 맞아 극장을 찾은 어린 학생들과 여성 학부모들이 가장 많이 희생됐다. 시카고시는 사건 직후 비상구 표시등 부착을 의무화하고 극장 소방법을 제정, 재발 방지에 나섰으나 극장의 참사는 대륙을 오가며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초대형 극장 화재 사고의 절반 이상이 중국에서 발생한 발생한 가운데 한국에서도 1971년 대연각호텔 화재 사건(162명 사망)과 2003년 대구 지하철 화재(198명 사망) 등 사람의 실수나 고의로 인한 인재(人災)가 잇따랐다.
단일 건물 기준으로는 가장 짧은 시간에 최다 인원의 목숨을 앗아간 최악의 화재사건으로 손꼽히는 이로쿼이 극장 화재는 세월 속에 파묻힌 채 잊혀지고 있어도 투자론에는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월가의 투자전략가 로버트 맨셜은 주가가 폭락할 때 공포에 휩싸여 투매하는 투자자를 불길 속의 극장에서 무질서하게 비상구를 찾다 압사하는 경우와 비슷하다고 강조한다. 비이성적 판단과 행동이 투자자 자신을 ‘비상출구 없는 극장’ 안에 가둬 결국 ‘참사’를 당할 수 밖에 없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얘기다.
정치의 영역에서도 ‘극장의 참사’는 존재한다. 살인적인 인플레이션과 경제 침체에 시달리던 독일 국민들은 ‘잘 살 수 있다’는 믿음 아래 히틀러에게 92%의 표를 몰아준 적도 있다. ‘극장의 참사’는 예방할 수 있을지 몰라도 더 무서운 참사도 있다. 독일계 유대인으로서 미국의 여류 정치철학자로 이름을 날린 한나 아렌트는 사회 구성원들이 고민하거나 생각하기를 싫어하는 무사유가 치명적 범죄를 야기한다는 경고장을 50 여년전에 띄웠다. 요즘이라고 다르지 않다. 국민들의 정치적 무관심과 판단 착오 또는 맹목적이고 과도한 쏠림은 ‘국가의 참사’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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