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 버냉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ㆍ연준) 의장의 말은 알아듣기 쉽다. 메시지는 분명하고 명료하다. 버냉키의 발언을 두고 시장이 헷갈려 하는 일은 어지간해선 없다. 좌회전 깜박이 켜고 우회전하는 법은 더더욱 없다. 자신의 말귀를 시장이 제대로 알아듣지 못할 땐 비공개석상에서 틀렸다고 해명한 적도 있다. 물론 시장의 오역을 지적한 바로 그 친절함이 방송에 여과 없이 보도돼 홍역을 치르긴 했지만. CNBC 여성앵커인 마리아 바르티로모의 버냉키 발언 폭로 소동을 두고 하는 말이다. 애매모호한 화법을 즐겼던 전임자 앨런 그린스펀과는 시장소통 철학부터 달랐다. 이런 소신은 근 100년 만에 연준 의장이 기자회견장에 나서는 새로운 전통을 만들었다.
그런데 2주 전 기자회견에서 사달이 나도 단단히 났다. 출구전략 시간표를 입밖에 꺼내자 세계 금융시장은 그야말로 쑥대밭이 돼버렸다. 그것도 다우지수가 최고치를 갈아치우며 흥이 막 달아오르는 시점에서 나왔다. 2006년 임기 첫해를 제외하곤 7년 내내 질펀한 유동성 잔치판을 벌인 주역이 퇴임을 불과 반년을 남겨두고 진공청소기를 자임했으니 어리둥절할 수밖에. 공중에서 돈을 뿌려대야 할 헬리콥터 벤의 불시착에 세계 금융시장이 화들짝 놀라지 않으면 되레 이상할 터.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형국이다. 윤전기 아베라지만 원조는 버냉키가 아닌가. '파티가 막 시작했을 때 펀치볼(punch bowlㆍ화채그릇)을 치워버리는 게 중앙은행의 임무'라는 윌리엄 맥체스니마틴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부류다.
급기야 연준 수뇌부까지 출구메시지 혼선 수습에 나서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연준의 2인자인 윌리엄 더들리 뉴욕 연준 총재는 "출구전략은 시간표의 문제가 아니라 경제상황에 달렸다"며 과잉 반응을 경계했다. 한방 제대로 얻어맞은 시장도 그제서야 버냉키 발언을 재해석하느라 야단법석이다.
버냉키 의장이 이제 와서 왜 파티의 흥을 깨려는 것인지 그 속내는 알 길이 없다. 발언은 온탕과 냉탕을 오갔다. 경제가 지속적으로 개선된다면 연말쯤 양적 완화를 축소하고 내년 중반엔 종료할 수 있다는 게 그의 말이다. 금리인상은 먼 미래의 일이라고도 했다. 방점이 어디에 있는지 헷갈린다. 언어적 유희를 즐겼던 그린스펀과는 다른 차원의 모호함이라고 할까. 출구를 입에 올린 것은 미국 경제가 회복의 반열에 다가가고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하고 반대로 한계효용체감법칙에 따른 효율성 저하에 직면했다는 자인일 수도 있다. 2000년대 초 자산버블을 낳고 결국 금융위기의 단초를 제공한 그린스펀의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생각일지도 모를 일이다. 다만 출구전략 시행에 미리 대비하라는 신호를 주겠다는 의도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어쨌든 글로벌 금융시장은 출구전략에 대비한 소방훈련 한번 제대로 했다.
미국의 출구 찾기는 우리에겐 양날의 칼이다. 출구로 나아간다면 미국 경제가 탄탄해졌음을 알리는 방증이다. 대외의존도가 높은 우리 경제엔 좋은 일이다. 반면 감내해야 할 리스크 요인도 있다. 선진자본의 본국 회귀에 따른 자본 유출이 예상외로 클 수도 있다. 어느 쪽의 파장이 더 큰지 예단하긴 어렵다. 1998년과 2004년 미국의 긴축시기와 비할 바 못 된다.
양적 완화의 종료와 유동성 흡수는 우리 경제가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미지의 길이다. 아직은 시간이 남았으니 출구전략에 지레 겁먹을 것은 없다. 언젠가는 닥칠 일이고 그 충격파를 여하히 흡수하느냐가 관건이다. 미국의 통화정책 변화는 시기적으로 우리 경제의 변곡점과 거의 맞물린다. 내년은 우리 경제가 저성장 함정에 빠져들 수도, 반대로 성장궤도에 재 진입할 수 있는 중대한 시기다. 출구전략 가동 이전에 기초체력을 기르고 반듯한 성장궤도에 올라서지 못한다면 충격파는 클 수밖에 없다. 성장회복이 더디면 통화정책까지 제약을 받을 수 있다. 적어도 출구전략에 휩쓸려 떠밀리듯 금리를 인상하는 일만은 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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