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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러니로 점철된 종말의 서사 [북스&]

■헤르쉬트 07769(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지음, 알마 펴냄)





2025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헝가리 작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소설을 읽는 경험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마침표 하나 없이 수백 페이지를 가로지으며 끝없이 팽창되는 문장들은 따라가기도 벅찰 정도의 정보량과 에너지로 독자를 압도한다. 그러나 수백 가닥의 실처럼 뒤엉킨 이야기를 천천히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소설 속 인물과 세계의 감각이 손에 잡힐듯 다가오는 느낌이다. 신호는 물론 소음마저 완벽히 묘사하는 밀도 높은 문장들과 암울한 흑백 영화 같은 묵시록적 서사가 만나 빚어내는 통제 불가능한 파국의 분위기는 숨막힐듯 매혹적이다.

이번에 번역 출간된 ‘헤르쉬트 07769’ 역시 이런 그의 작가적 특징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작품이다. 그의 모든 소설은 사물의 종말을 예감하는 분위기로 가득한데 이번에는 우주적 종말에 관한 이야기가 모티브다. 독일 동부 튀링겐주에 위치한 가상의 마을 카나에서 살아가는 주인공 헤르쉬트 플로리안은 물리학 수업을 듣다 세상의 끝을 예감한다. 그는 이 위험을 알려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앙겔라 메르켈 총리에게 계속 편지를 보내는 등 무리한 시도를 이어가 마을 사람들의 웃음을 산다. 한편 제빵사로 실패한 헤르쉬트는 바흐의 음악을 숭배하는 ‘보스’의 청소 회사에 고용돼 일을 한다. ‘모든 것이 깨끗하리라’는 슬로건을 내건 이 회사는 사실 네오나치 조직이기도 하다. 어느날 바흐의 역사적 건물에 늑대 머리 벽화가 연달아 그려지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헤르쉬트는 분노한 보스가 꾸민 수상한 일들에 휘말린다.



세상의 끝과 공동체의 붕괴라는 종말론적 이야기 속에서 가끔 툭 하고 튀어나오는 농담과 아이러니가 소설의 재미를 더한다. ‘통치와 지배’를 뜻하는 이름인 헤르쉬트가 ‘동네 바보’ 취급을 받는 순박한 인물이라는 점이나 ‘순수 혈통’을 신봉하는 네오나치가 청소 업체를 운영하고 헤르쉬트가 우주적 종말을 막기 위해 인간의 정치 공동체에 집착하는 등의 모순이 소설적 웃음과 현실적 공포를 동시에 선사한다. 2만 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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