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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과잉 시대의 기업 위기 관리 [이보형의 퍼블릭 어페어즈]

이보형 마콜컨설팅그룹 사장

기술 결함으로 정치 논란 자초

2019년 보잉사태 단적인 사례

반면 삼성전자·SKT, 위기 진화

"법리보다 사고 이후 태도 중요"





최근 기업 위기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정치 과잉’이다. 사고의 실체나 영향이 파악되기도 전에 정치적 해석과 책임 공방이 먼저 등장한다. 위기 원인인 기술적 결함이나 사고는 즉시 정치적 논쟁거리로 전환되고 위기 상황은 정책 실패를 입증하는 재료로 소비된다. 이제 위기는 기업의 담장 안에서 통제되지 않는다. 여론이라는 거친 광장을 거쳐 곧장 국회와 정부로 직행한다. 위기의 정치화는 더 이상 예외적 상황이나 불운의 결과가 아니라 늘 고려해야 하는 구조적 변수가 됐다.

기술 문제가 정치문제로 전환되는 양상을 가장 잘 보여준 사례는 보잉 737 맥스(MAX) 사태다. 보잉의 협동체 기종인 보잉 737 MAX는 출시된 지 3년여 만인 2018~2019년 똑같은 양상을 보인 사고가 잇달아 두 번이나 발생하면서 기종 자체에 심각한 결함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결국 해당 기종은 2019년 초순에 전 세계에서 운항 중단됐다가 2020년 11월에서야 운항이 재개됐다. 그러나 보잉 737 MAX 9 기종은 2024년 1월 다시 미국에서 운항이 중단됐다.

당시 사고의 직접 원인은 자동비행보정시스템이라는 기술적 결함이었다. 그렇지만 사건은 곧 기술의 영역을 벗어났다. 사고 직후 보잉은 기체의 안전성과 조종사 훈련 문제를 강조하며 법률과 엔지니어의 언어로 대응에 나섰다.

하지만 대중이 던진 질문은 달랐다. ‘이 기업은 비용과 일정 압박 속에서 안전을 뒤로 미룬 것 아닌가’란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순간, 사고는 기술적 문제에서 대중의 분노로 전환됐고 분노는 곧 정치의 언어를 불러왔다. 미 의회는 청문회를 열었고 회사뿐만 아니라 규제 당국의 감독실패까지 문제 삼았다. 기술사고가 항공 안전체계 전반에 대한 정치적 심판으로 확장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사망자 수나 결함의 복잡성이 아니었다. 대중은 위기 상황에서 확률을 계산하지 않는다. 통제 가능성과 책임 의지를 본다. 책임 귀속이 먼저 이뤄지고, 감정이 형성되며, 그 감정이 규제의 근거가 된다. 위기의 정치화는 감정의 문제이자 규제의 문제다.

학문적으로도 이는 확인된 현상이다. 세계적 위기관리 전문가인 쿰즈의 상황적 위기 커뮤니케이션 이론(SCCT)은 이해 관계자들이 기업 책임을 높게 인식하는 위기에서는 방어적 해명이 오히려 역효과를 낸다고 말한다. 다른 위험인식 연구도 같은 결론에 이른다. 사람들은 확률과 수치보다 공정성, 통제 의지, 과거의 태도를 근거로 위험을 판단한다. 정치 과잉 환경에서는 이 판단이 더 빠르고 단순해진다. 사실 확인이 끝나기 전부터 책임에 대한 인식이 굳어지고 그 인식은 정책과 규제의 근거가 된다.

이 점에서 SK텔레콤의 대응은 참고할 만한 사례다. 지난해 일련의 개인정보유출사건에서 큰 사회적 주목을 받은 기업은 SK텔레콤이었다. 그러나 사건 이후 비교적 빠른 정보 공개와 고객 안내, 유심 교체 등 가시적 조치를 통해 정보 공백을 줄이려 했다. 완벽한 대응이었다고 말하기는 어렵고 배상 범위를 둘러싼 논란도 있었다. 그럼에도 위기를 ‘법률 분쟁’ 이전에 ‘신뢰 관리 문제’로 인식하고 대응의 속도를 높인 점은 정치화의 온도를 낮추는 데 기여했다. 핵심은 위기 이후의 태도였다.



더 극적인 사례는 2016년 삼성전자의 갤럭시 노트7 리콜이다. 배터리 발화 원인이 명확히 규명되지 않은 상황에서 삼성은 ‘단종’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제품을 포기하고 브랜드를 지키는 선택이었다. 직접 손실만 3조 원이 넘는 손실을 감수한 이 결정은 재무적 계산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그러나 당장의 손해보다 ‘품질과는 타협하지 않는다’는 단호한 행동이 있었기에, 삼성은 글로벌 소송과 규제의 파도를 넘어 신뢰를 회복할 수 있었다. 핵심은 무사고가 아니라, 사고 이후 보여준 책임의 밀도였다.

정치 과잉의 시대에 기업이 준비해야 할 것은 화려한 언변이 아니다. 단단한 체계다.

무엇보다도 위기 초기에는 법률의 언어를 최소화해야 한다. ‘법적 검토 중’이라는 표현은 대중에게 책임을 피하겠다는 신호로 읽힌다. 첫 메시지는 상황을 엄중히 인식하고 있다는 공감과, 피해를 줄이겠다는 의지가 중심이 돼야 한다. 법리는 그 다음 문제다.

물론 법적 리스크 관리는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론 충분하지 않다. 지금의 기업 위기는 서초동 법정이 아니라 ‘국민 정서의 법정’에서 먼저 판결이 내려진다. 법을 지켜도 여론을 잃으면 기업은 설 자리가 없다.

위기 후의 태도도 중요하다. 이를 위해 사과문보다 강력한 것은 행동의 시각화다. 종이 한 장의 사과문보다 최고경영자(CEO)가 현장에서 땀 흘리는 모습, 피해자와 눈을 맞추는 장면 하나가 훨씬 강력하다. 정치는 이미지로 작동한다. 기업의 위기 대응 역시 대중의 기억에 남을 장면을 만들어야 한다.

위기는 단순한 사고가 아니다. 기업의 철학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기술보다 태도가, 법리보다 공감이 먼저 평가받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체계를 구축하고 태도를 바꾸지 않으면, 2차 3차 위기의 파도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서경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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