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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터리] 시간을 담그는 문화, 한국의 장

이규민 한식진흥원 이사장





2024년 12월, 파라과이 아순시온에서 열린 유네스코 정부간위원회 회의에서 ‘한국의 장 담그기 문화’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한국 전통 음식 문화로서는 2013년 ‘김장 문화’에 이어 두 번째로 국제사회가 그 가치를 공식 인정한 사례다. 농림축산식품부와 한식진흥원이 지난 10여 년간 장 문화의 의미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확산해온 노력의 결실이기도 하다.

우리는 장을 단순한 조리 기술이 아닌 자연과 시간, 공동체의 삶이 축적된 문화로 바라보는 시각을 꾸준히 제시해왔다. 장 담그기 문화가 지닌 본질은 기다림과 축적에 있다. 콩을 삶고 메주를 띄운 뒤 계절의 흐름에 맡기는 과정에는 자연과 공존하려는 태도와 서두르지 않는 삶의 철학이 담겨 있다. 이러한 가치야말로 장 문화가 오늘날 다시 주목받는 이유다.

한식의 깊은 맛의 중심에는 언제나 장이 있다. 된장과 간장·고추장은 단순한 양념을 넘어 한식의 맛 구조를 설계하는 기준점이며 한식 특유의 깊이와 여운은 바로 장에서 비롯된다. 이는 최근 미식 트렌드에서도 확인됐다. 한식진흥원이 매년 주최하는 ‘한식 컨퍼런스’에서 미쉐린 3스타 강민구 셰프는 ‘오래된 미래: 한국의 장’을 주제로 발표하며 장을 한국 요리가 다시 돌아봐야 할 출발점으로 제시했다. 그는 장이 지닌 발효의 시간성과 축적의 미학이 현대 미식이 추구하는 깊이와 지속성을 가장 잘 설명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장을 레시피의 일부가 아닌 요리의 방향을 결정하는 철학으로 바라보며 빠른 결과와 강한 자극에 익숙해진 시대일수록 시간을 들여 완성되는 장의 가치는 더욱 선명해진다고 전했다.



장 문화의 또 다른 특징은 다양성이다. 같은 재료로 담근 장이라도 지역의 기후와 물, 담그는 이의 손길에 따라 전혀 다른 맛이 완성된다. 이는 장 문화가 지역성과 공동체의 기억을 품은 살아 있는 문화임을 보여준다. 발효를 통해 얻어지는 영양학적 가치도 장이 주목받는 이유다. 인공적인 첨가에 의존하지 않는 깊은 맛과 유익균은 건강한 식생활과 지속 가능성에 대한 현대사회의 관심과 맞닿아 있다.

이제 장 문화는 보존의 대상이자 동시대적으로 확장될 수 있는 문화 자산이다. 전통의 가치를 존중하면서도 체험과 교육, 미식 콘텐츠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일상 속에서 이어져야 한다. 특히 이러한 장 문화의 가치가 특정 전문가나 현장의 관심에 그치지 않고 사회 전반으로 공유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장은 시간이 만들어내는 맛이자 축적된 경험의 결과이지만 그 의미는 설명되고 전달돼야 다음으로 이어질 수 있다.

장 문화를 주목하는 배경에는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공감 가능한 이야기로 풀어내려는 지속적인 노력이 있었다. 한식진흥원은 장 문화가 일시적인 유행이나 상징에 머무르지 않고 한국 식문화의 중요한 축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기반을 다져왔다. 기록과 연구를 지속하고 콘퍼런스와 세미나, 교육 및 체험 프로그램 등을 통해 장의 가치를 오늘의 언어로 풀어내고 있다. 이는 장을 중심으로 한 한식의 깊이와 철학이 다음 세대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일수록 오래된 방식은 새로운 해답이 된다. ‘오래된 미래’라는 말처럼 장 문화는 한식이 나아갈 방향을 조용히 보여준다. 시간을 들여야 완성되는 장처럼 한식 역시 깊이를 더하며 사람과 사람을 잇는 문화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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