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정치가 갈 데까지 갔다. 까도 까도 나오는 의혹에 결국 제명된 김병기 전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초대 기획예산처 장관에 지명된 이혜훈 전 의원 등을 보면 허탈하기까지 하다. 먹고살기 힘든 시절 횡행했던 막걸리 선거, 노골적으로 불법 자금을 퍼 날랐던 차떼기 사건 등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각종 시스템은 현대화됐는데도 왜 우리 정치는 퇴행하는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하게 된다.
만약 정치권에서 딱 하나를 도려낼 수 있는 특권이 부여된다면 ‘진영 논리’를 잘라내고 싶다. 우리 정치가 이토록 썩은 것은 옳고 그름을 판단해 회초리를 들어야 할 때 우리 편이라는 이유로 그냥 넘어가는 진영 논리가 팽배해진 게 결정타라는 생각이다. 진영 논리가 단순한 생각 차이를 넘어 어떻게 부패의 온상이 되고 국가적 비효율을 낳는지 그 악순환의 메커니즘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
일단 진영 논리는 정치인을 부패에 둔감하게 만든다. 당장 권성동·전재수 의원 등 여야를 막론하고 얽혀 있는 통일교 금품 수수 의혹을 한번 보자. 우리 편이 돈을 받으면 합법적 후원금이지만 다른 편에서 받으면 조직적 로비가 되는 게 바로 진영 논리의 비호 때문이다. 부패 수사가 시작되면 정치 탄압으로 프레임을 전환하는 것도, 내부고발자가 나오면 이른바 ‘수박(배신자)’ ‘프락치’로 몰아 입을 틀어막는 것도 진영 논리의 방패막이 기능이 있어 가능하다. ‘우리가 문제여도 저쪽은 더하니 괜찮다’는 태도가 특정 사과의 썩은 부위를 발라내는 게 아니라 상자 안 사과 전체를 썩게 만든다.
무엇보다 진영 논리는 정치권의 전문성도 약화시킨다. 지금 여야를 한번 보자. 요직에 앉아 있는 인물의 면면을 보면 ‘충성심’ ‘투쟁력’만 강한 이들이 많다. 정치는 복잡한 사회 갈등을 조정하고 정책적 대안을 만드는 영역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이른바 ‘싸움닭’의 중용은 대화보다는 고소·고발부터 하는 정치의 사법화, 정책 경쟁 퇴조에 따른 입법 품질 저하를 초래하게 된다. 숙의 민주주의 실종, 머릿수로 밀어붙이는 형식적 민주주의와 결과에만 집착하는 정치 문화의 배경에도 진영 논리가 똬리를 틀고 있다.
진영 논리는 자원 왜곡, 정책의 비효율도 초래하기 십상이다. 백년대계라는 에너지 정책은 진영 논리에 따라 ‘원자력발전 vs 신재생’이라는 이분법적 도식에 갇혀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치르고 있다. 보수는 ‘원전 강국’, 진보는 ‘탈원전과 신재생’을 성역화하면서 두 에너지원이 상호 보완재가 아닌 적대적 관계가 됐다. 부동산 정책의 극단적 널뛰기, 진영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도구처럼 전락한 외교·안보 정책 역시 그런 류에 속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회에서 건전한 비판 및 견제 세력을 유명무실하게 만드는 것 또한 진영 논리의 폐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시민단체는 제5부로 평가받는다. 그 전제 조건은 공평무사한 비판이다. 어떤 집단, 어떤 세력에 대해서도 동일한 잣대를 들이댈 수 있어야 한다. 비리를 저지른 인물의 이념 성향이나 친소 관계에 따라 비판의 강도가 달라지고 선택적 비판을 할 경우 이미 권력 감시 기능을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과거에 비해 시민단체의 위상이 추락한 데는 시민단체가 진영 논리에 휘둘려온 탓이 크다.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입법·행정·사법부가 서로를 감시하도록 설계돼 있다. 하지만 진영 논리가 극심해지면 이 기관들이 국가의 이익이 아닌 진영의 이익을 대변하기 시작한다. 진영 논리가 견제와 균형이라는 민주주의 토대마저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까지 미치면 섬뜩하기까지 하다.
결국 망국병 진영 논리를 깨야 미래가 있다. 유권자 스스로 진영의 전사(戰士)가 아니라 비판적 시민이 돼야 한다. 비판적 시민은 진영 논리라는 가스라이팅에 넘어가지 않는다. 선거에서 지지층의 무서운 변심을 보여줘야 한다. 지지층이 진영의 허물을 직시하고 제대로 비판할 수 있을 때, 정치인들도 ‘진영’ 뒤에 숨는 비겁한 행위를 멈추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정치인들은 비로소 ‘싸움닭’ 대신 ‘전문가’를 찾기 시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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