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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 규제가 괴물을 키웠다

■노희영 생활산업부장

골목 상권 살린다며 대기업에 족쇄

무주공산된 시장서 쿠팡만 급속성장

잘못된 입법 개인정보 유출사태 초래

대형마트 새벽배송 규제 등 풀어야

더불어민주당 을지로위원장인 민병덕 의원과 소상공인들이 5일 국회 소통관에서 쿠팡이 골목상권과 지역경제 기반을 몰락시킨다며 규탄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인 1996년. 당시 김영삼 정부는 ‘세계화’를 국정과제로 내걸고 선진국 클럽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을 추진했다. 자본시장 및 서비스시장 자유화와 유통시장 개방은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유통산업발전법이 만들어진 것도 이때다. 까르푸·월마트 등 글로벌 유통 공룡들의 국내 진출에 대응해 유통산업의 체질을 개선하고 경쟁력을 확대하자는 취지에서 1997년 제정·시행됐다. 시행 초기 유통산업발전법은 제 역할을 충실히 하는 듯 보였다. 이마트 등 토종 대형마트들이 빠르게 성장했다. 이들과의 경쟁에서 실패한 까르푸와 월마트가 2006년 한국에서 철수했고 한국은 ‘글로벌 유통 기업의 무덤’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하지만 대형마트와 기업형슈퍼마켓(SSM)이 공격적으로 확장하면서 지역상권이 붕괴되고 영세 상인들이 고사한다는 비판이 나오기 시작했다. 급기야 골목상권을 살리기 위해 대형마트를 강력 규제하는 유통산업발전법 개정안이 2012년부터 시행됐다. 이후 대형마트는 쇠락의 길을 걸었다. 월 2회 일요일 강제 휴무로 주말에 온 가족이 마트에서 장 보고 외식하던 문화는 사라졌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온라인 장 보기 트렌드를 가속화했다. 자정부터 오전 10시까지 영업이 금지되면서 대형마트가 전국의 매장을 물류 거점으로 활용해 새벽배송 등 온라인을 강화할 수 있는 길도 봉쇄됐다.

유통산업발전법이 국내 유통 대기업의 혁신과 변화를 가로막으며 심야 및 새벽과 주말 유통시장이 ‘무주공산’이 되자 규제 사각지대에 있던 쿠팡을 비롯한 e커머스(전자상거래) 업체들이 급격하게 성장했다. 산업통상부에 따르면 전체 유통 업계 매출에서 온라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지난해 11월 기준 54.1%로 오프라인을 앞섰다. 특히 쿠팡은 로켓배송 서비스를 선보이며 6조 원 이상을 물류망 구축에 투입해 전국을 쿠세권(쿠팡 로켓배송 권역)으로 만들며 시장을 독식했다.



이마트와 홈플러스·롯데마트 등 대형마트 3사의 합계 매출은 2023년 처음으로 쿠팡에 추월당한 후 그 격차는 더욱 커지고 있다. 대형마트 3사의 점포 수도 2015년 414개에서 지난해 9월 말 기준 392개로 감소했다. 기업회생 절차를 밟고 있는 홈플러스가 향후 6년간 41개 점포를 폐점하겠다고 밝힌 만큼 점포는 더욱 줄어들 것으로 전망된다. 대형마트 규제의 명분이던 전통시장 살리기 효과도 거두지 못했다. 서울시에 따르면 남대문시장·방산종합시장 등 중구에 위치한 전통시장 점포 수만 2019년 1만 7407개에서 2024년 1만 6161개로 1246개(7.2%)가 감소했다.

이런 가운데 최근 고객 3370만 명의 개인정보 유출 사태와 이에 대한 쿠팡의 안이하고 무책임한 대응은 결국 ‘잘못된 입법의 산물’이라는 비판이 커지고 있다. 쿠팡이 수년간 조 단위의 적자를 감내하며 물류 인프라를 구축한 것이나 로켓배송에 익숙해진 소비자들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유통산업에서 공정한 경쟁이 이뤄지지 못하고 이러한 틈새를 파고든 쿠팡이 시장을 독식해 소비자들을 길들이도록 방치한 것은 다름 아닌 정부와 국회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정부나 여야가 과거를 되돌아보고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 파악 및 재발 방지책을 찾으려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국회는 청문회 개최에 이어 국정조사를 하겠다고 벼르고 있고 정부는 쿠팡 사태 범부처 태스크포스(TF)까지 만드는 등 쿠팡 때리기에만 골몰하고 있다.

유통산업발전법은 실효성에 대한 충분한 검증 없이 무리하게 강행된 것도 모자라 지난해 말 일몰 기한이 2029년까지 4년 연장됐다. 이제라도 유통산업발전법이 그동안 유통산업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개선할 부분은 없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대형마트 업계에서는 쿠팡의 독주를 견제할 수 있도록 새벽배송 허용 등 영업제한 규제를 풀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규제나 징계·과징금 등이 독점을 해소하는 만능 해결책은 아니다. 기업 간 경쟁 체제를 유도하고 소비자들의 선택권을 확대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더 이상 쿠팡과 같은 괴물이 등장하지 않게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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