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의 마지막 하루다. 돌아보니 모두가 ‘다사다난’ 그 자체였던 한 해다. 불법 비상계엄의 후폭풍을 그대로 안고 시작한 을사년은 사상 초유의 대통령 권한 ‘대대대행 체제’가 상징하듯 혼란의 절정으로 치달았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탄핵되고 비리에 연루된 영부인과 함께 구속 수감되는 걸 보면서 어느 후진국의 정치라도 아래로 내려다볼 수 없는 처지에 국민은 허망했다. 새 대통령을 뽑는 선거 일정이 4월 8일 결정되고 유례를 찾기 힘든 혼탁한 선거전을 거쳐 6월 4일 이재명 정부가 출범했다.
국내 정치 불안에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가 몰고 온 관세 폭풍으로 한국 경제는 상반기 내내 0%대 성장률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이 국내외에서 영속할 듯 쏟아졌다. 저성장의 굴레를 결국 벗지는 못했지만 반년이 안 돼 올해 성장률 앞자리를 0에서 1로 기적처럼 바꿔놓은 주역은 누가 뭐래도 기업이다. 새 정부가 추경을 통해 민생 지원 소비쿠폰을 14조 원어치 뿌린 것이 ‘반짝 부양’ 효과는 냈지만 글로벌 인공지능(AI) 혁명의 한 축을 당당히 차지한 반도체 기업들이 있어서 수출이 최초로 7000억 달러를 돌파하며 경기회복을 이끌 수 있었다.
무정부 상태 같은 6개월에도 20년 만에 한국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와 최고경영자(CEO) 서밋이 성공적으로 치러질 수 있었던 것 역시 기업인들이 정부 공백을 메우기 위해 전 세계를 누비며 치열하게 준비한 덕분이다. 트럼프의 막무가내식 관세 폭탄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한미 동맹을 굳건히 지킨 최대 버팀목 또한 한국 기업들이 피땀 흘려 세운 조선 산업 경쟁력이었다.
반등의 기회는 잡았지만 갈 길은 여전히 멀다. 우리보다 경제 규모가 15배 이상 큰 미국의 3분기 경제성장률은 4.3%에 달했다. 한국은 같은 시기 1.3% 성장에 머물렀다. 미국의 올해 성장률은 환산하면 국내총생산(GDP)을 약 1조 달러(약 1435조 원) 늘려 한국 경제 규모의 절반 이상을 새로 만들어낸 셈이다. 그런데도 미국의 성장률이 내년에도 한국을 웃돌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한 형편이다.
허약해진 경제 체력을 살리는 길은 정부 지출의 확대가 아닌 성장 주체인 기업의 투자와 혁신을 확산할 규제 혁파에서 찾아야 한다. 정부가 내년부터 법인세를 올리고 노동조합법을 강화한 마당에도 기업인들은 성장의 골든타임을 놓치지 말자며 “위험을 감수하며 새로운 길을 개척할 수 있게 정책적 뒷받침과 사회적 공감이 필요하다”고 호소한다.
성장 둔화와 물가 상승 속에 정부의 최대 고민인 청년층 취업난을 완화할 열쇠도 기업에 있다. 20대 청년들이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구직을 아예 포기해 청년층 고용률은 19개월 연속 떨어지다 못해 이젠 청년 경제활동 참가율이 60대 이상 고령층보다 낮아졌다. AI와 로봇의 증가로 미국에서는 월스트리트저널(WSJ)이 최근 “기업들의 경영 전략은 ‘채용하지 말라(Don’t hire)’로 요약된다”고 보도할 정도지만 한국은 사뭇 다르다.
메모리반도체 슈퍼사이클을 맞은 삼성전자를 필두로 삼성그룹은 내년부터 신규 채용 규모를 1만 2000명으로 올해보다 20% 늘리기로 했다. SK그룹 역시 채용 확대에 나서는 한편 SK하이닉스가 국내 최고 성과급 기준을 제시해 의대에 몰리던 인재들을 다시 공대로 유턴하도록 이끌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2030년까지 국내에 125조 원을 투자한다고 밝히면서 내년 채용 규모를 1만 명으로 올해보다 3000명 가까이 늘렸고 LG그룹은 한국형 AI 모델 개발을 주도하며 미래를 정하지 못한 청년들에게 다양한 교육 기회를 주고 있다. 일각에서는 청와대가 대기업들의 팔을 비틀어 청년 채용을 늘리게 한 것이라며 실제 효과에 물음표를 제기하지만 실용주의의 화신인 기업이 실질적 계획도 없이 고용을 늘려 부담을 자초할 리는 없다.
결국 경제성장과 일자리 창출 등 경제뿐 아니라 외교 안보와 통상 문제, 교육 등 사회적 난제까지도 기업들이 신명 나게 제 역할을 다할 수 있다면 해결의 문이 열릴 수 있다. 기업이 당장 내일부터 붉은 말처럼 역동적으로 달릴 수 있도록 진심으로 정부가 지원하기를 소망한다. 기업이 내일의 태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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