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검색
팝업창 닫기
이메일보내기

벙커 속에서 목격한 전쟁의 비극

◆[리뷰] 연극 '벙커 트릴로지'

전쟁 참호처럼 꾸며진 빽빽한 좌석

관객, 벙커 속 군인이자 목격자 역할

극 곳곳에 참여시켜 압도적 몰입감

모르나가·아가멤논·멕베스 재해석

인간성 상실 과정 입체적으로 그려

연극 '벙커 트릴로지'의 공연 장면 /제공=아이엠컬처




연극 '벙커 트릴로지' 중 ‘멕베스’ 에피소드의 공연 장면 /제공=아이엠컬처


고대 그리스의 3대 비극 시인 아이스킬로스가 쓴 '아가멤논'은 미케네의 왕이자 트로이 전쟁에서 그리스 연합군을 승리로 이끈 영웅 아가멤논을 주인공으로 하는 비극이다. 아가멤논은 장녀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치는 등 수많은 고초를 겪으며 10년 만에 승전고를 울린다. 하지만 고국으로 돌아온 그를 기다리는 것은 남편의 사촌과 바람이 난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의 칼날이었다.

전쟁 영웅의 죽음과 아내의 배신. 요약하면 막장 치정극이 되는 이 결말의 원인을 찾으려면 전쟁이 벌어진 10년 동안 남편과 아내 두 사람 사이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세 편의 고전을 재해석한 삼부작 연극 '벙커 트릴로지'의 2부 격인 아가멤논 에피소드가 파고드는 지점도 바로 이곳이다. 독일군 최고의 저격수인 전쟁 영웅 알베르트를 아가멤논에, 여성 참정권을 외치는 주체적 여성이자 사랑스러운 영국인 아내 크리스틴을 클리타임네스트라에 등치시킨 연극은 전쟁이 각자의 삶을 어떻게 파멸시키고, 영원할 것 같았던 사랑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를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

약 70분간 펼쳐지는 심플한 서사의 이 연극을 특별하게 만드는 첫 번째는 압도적인 몰입감이다. 관객들은 전쟁 참호처럼 꾸며진 100석 규모 지하 벙커 안에 빽빽히 앉아 배우들과 불과 몇 인치 떨어진 자리에서 공연을 관람하게 된다. 관객의 몰입을 배가하는 연극적 장치도 많은데 예를 들어 '멕베스' 에피소드의 경우 관객 입장시 군번줄을 나눠주고 대대장이 입장하는 순간 모두가 기립해 경례하도록 구성했다. 이로써 관객들은 이 이야기와 함께하는 벙커 속 군인이자 전쟁의 참상을 바라보는 목격자로서 기능하게 된다.



연극 '벙커 트릴로지' 공연 장면 /제공=아이엠컬처


3부작 구성을 적극 활용한 연출도 매력적인 요소다. '벙커 트릴로지'를 이루는 세 편의 에피소드는 아서왕의 전설에서 영감을 얻은 '모르나가'와 그리스 비극 아가멤논을 각색한 '아가멤논',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각색한 '멕베스'로 주제나 서사 모두 독립적이다. 예컨대 '모르나가'는 세 친구의 우정이 핵심이고 '아가멤논'은 남녀 간 사랑이 중심 정서다. 또 '모르나가'와 '멕베스'가 1차 대전 연합국의 주축인 영국군 참호를 배경으로 한다면 '아가멤논'은 독일군 장교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러나 세 이야기는 폭발음이 터지는 벙커 안에서 이뤄진다는 점에서 동일하고 등장인물 모두가 전쟁 트라우마라는 심리적 고통에 몸부림친다는 점에서 같다. 배우들을 작품 속 배역 대신 솔져1, 2, 3, 4로 소개하는 것도 전쟁 앞에서 모두가 희생자임을 강조하는 장치다.

작품은 하루 세 번, 에피소드 세 편을 무대에 올리는 방식으로 공연되는데 이때 4명의 배우가 세 작품에서 각기 다른 역할을 맡는다는 점도 관객들의 흥미를 높이는 요소다. 아가멤논은 솔져1이 주역이라면 멕베스는 솔져2가 높은 비중을 가져가는 식이다. 같은 얼굴이 다른 이야기 속 인물로 변신하면서 세 편의 에피소드는 전쟁이라는 비극이 인간성을 어떻게 무너뜨리는가를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서사로 완성된다.

2016년 초연과 2018년 재연 이후 7년 만에 돌아온 작품은 배우들의 열연으로도 입소문을 탔다. 특히 초연부터 계속 참여한 이석준, 정연, 신성민 등은 배역 일체나 다름없는 연기력으로 눈길을 끈다. 초연과 재연에서 전석 매진 기록을 세웠던 작품은 이번에도 오픈 회차 66회가 전석 매진되는 등 흥행 열기를 이어가고 있다. 서울 대학로 홍익대아트센터 소극장에서 내년 3월 2일까지.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6 트윈트리타워 B동 14~16층 대표전화 : 02) 724-8600
상호 : 서울경제신문사업자번호 : 208-81-10310대표자 : 손동영등록번호 : 서울 가 00224등록일자 : 1988.05.13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서울 아04065 등록일자 : 2016.04.26발행일자 : 2016.04.01발행 ·편집인 : 손동영청소년보호책임자 : 신한수
서울경제의 모든 콘텐트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복사·배포 등은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Copyright ⓒ Sedaily, All right reserved

서울경제를 팔로우하세요!

서울경제신문

텔레그램 뉴스채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