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형 간염 백신은 낳자마자 맞히는 거 아니었어?"
만 10개월이 갓 지난 딸아이를 키우느라 육아휴직 중인 친구에게서 기사 링크와 함께 카카오톡 메시지가 왔습니다. 미국의 백신 접종 정책을 좌우하는 질병통제예방센터(CDC) 산하 예방접종자문위원회(ACIP)가 '신생아 B형간염 예방접종 권고'를 34년 만에 폐기하기로 결정했다는 기사였죠.
로이터 통신 등 외신 보도에 따르면 지난 5일(현지시간) ACIP는 'B형 간염 바이러스 양성으로 나오는 1% 미만의 산모가 낳은 신생아'에게만 백신 접종을 권고하는 안을 표결로 채택했습니다. B형간염 바이러스 음성인 산모로부터 태어난 대다수 신생아에겐 B형간염 백신 접종을 의무화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구체적으로는 생후 2개월이 지날 때까지 첫 접종을 하지 않고 산모와 의료진이 협의해 B형간염 백신 접종 여부와 시기를 결정하기로 했습니다. 총 3회로 이뤄지는 접종 스케줄 동안에도 2회차와 3회차 접종 전 B형간염 항체 검사를 받도록 권고했죠.
현재 B형간염 백신은 신생아의 감염을 최대한 빨리 차단하기 위해 생후 24시간 안에 첫 접종이 이뤄집니다. 세계보건기구(WHO) 역시 B형간염에 걸린 신생아 중 약 95%는 만성 간염으로 진행된다며 이를 지지하고 있죠.
통상 CDC는 감염병 전문가들로 구성된 ACIP의 권고안을 채택해 왔습니다. 만약 CDC가 이번 권고안을 채택한다면 당장 건강보험의 보장 범위가 달라지고 백신 접종비가 오를 것이 자명하기 때문에 사실상 백신 접종이 어려워집니다. 더욱이 미국 뿐 아니라 우리나라 등 해외 다른 나라에도 영향을 끼칠 가능성도 배제하기 힘들죠.
문제는 ACIP의 이번 결정이 새로운 안전성 문제나 유효성을 문제삼는 논문 등이 아닌, 정치적 배경에서 비롯됐다는 겁니다. 실제 이번 표결에 참여한 11명 중 찬성표를 던진 8명의 위원 대부분은 수십년간 백신 회의론을 주창해 온 로버트 F. 케네디 주니어 미 보건부 장관이 올해 6월 기존 17명의 위원 전원을 해임하고 새로 임명한 인사들로 알려졌습니다. 미 보건당국은 케네디 장관 취임 이후 기존의 정책을 뒤집는 정책 기조로 연일 논란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고령자 등 고위험군에게도 코로나19 백신 접종을 권하지 않도록 하는가 하면 4세 이전에는 홍역·볼거리·풍진·수두(MMRV)를 한 번에 예방하는 혼합백신을 접종하지 말라는 권고안을 채택하기도 했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 발표 직후 "대부분의 아기들은 B형 간염 위험이 전혀 없다"며 "매우 좋은 결정을 내렸다"고 환영의 뜻을 밝혔습니다. 반면 미국 소아과학회, 미국의사협회 등 전문가 단체는 "근거 없는 무책임한 주장에 기반한 결정으로, 영유아의 B형간염 감염을 증가시킬 것"이라고 반발하고 있습니다.
다만 국내에서 미국의 결정을 따를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입니다. 한국은 1980년대까지 B형 간염 유병률이 8~10%에 달하는 '중위험국'이었는데, 1983년 B형간염 백신 도입을 시작으로 1995년 국가예방접종사업 시작, 2002년 'B형간염 주산기 감염 예방사업' 전면 시행을 통해 현재 유병률 3% 미만의 '통제국'으로 진입했죠. 이는 국제적으로도 예방접종사업의 성공 사례로 꼽힙니다. 한국에서 B형간염은 여전히 중장년층 암 사망의 주범인 간암의 주요 원인 질환이기도 한데요. 간암 환자의 약 60~70%는 B형 간염에서 시작되며, 매년 수천 명이 B형간염 관련 합병증으로 사망하고 있습니다.
질병관리청도 현재로선 백신 접종 정책 변화를 검토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ACIP의 이번 결정의 간접적 파급 효과는 무시할 수 없을 걸로 보입니다. 백신 불신론자나 무용론자를 중심으로 "미국 CDC도 갓 태어난 아기한테는 B형간염 백신을 맞추지 않는다더라"는 논리가 확산될 경우, 모범 수준으로 유지돼 온 접종률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모든 국가가 B형간염 유병률과 관계없이 출생 후 가능한 한 빨리, 가급적 24시간 이내에 B형간염 백신을 접종할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WHO 회원국 194개국 중 116개국이 모든 신생아에게 출생 시 B형간염 백신 접종을 권고하고 있죠. 한국 정부도 이러한 기조에 따라 모든 신생아에게 출생 직후와 생후 1개월, 생후 6개월 총 3회 접종을 권고합니다. 정부가 접종비를 전액 지원하니 접종률도 96~97% 이상으로 높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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