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말기의 화가 안드레아 디 보나이우토의 프레스코는 단순히 지옥의 풍경이 아니다. 그저 공포심을 불러일으키자는 목적도 아니다. 중세 도미니코회의 신학에서 지옥은 혼돈이 아니라 각 죄인이 자신의 죄에 부합하는 자리에 배치되는 완벽한 질서가 존재하는 공간이다. 보나이우토의 그림이 그 명확한 위계적 구조를 보여준다. 색은 좌에서 우로, 위에서 아래로 갈수록 깊은 어둠을 표현한다. 빛에서 빛의 단절로의 단계, 그 마지막은 신적 광휘가 완전히 소멸된 심연, 곧 영적 공허의 공간이다. 맨 왼쪽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첫 번째 신자는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아담이다. 그 옆에 이브가 있고, 이브 뒤로 어린 양을 안고 있는 이는 세례 요한이다. 요한 뒤로 나무 상자를 들고 있는 남자는 아마도 노아일 것이다. 맨 오른쪽은 죄인들의 자리, 곧 지옥이다.
지옥은 또다시 여러 단계로 나뉜다. 먼저 이웃의 것을 탐하는 죄인 탐욕을 벌하는 특정 구역이 있다. 교만은 탐욕보다 무거운 죄로 더 아래층에 위치한다. 최악의 죄인 배신은 지옥 가운데서도 가장 깊은 심연에 자리하고 있다. 타락한 천사는 지옥에서 질서의 집행자다.
지옥이 신이 인간을 처벌하기 위해 만든 장치라는 건 오래된 오해들 가운데 하나다. 중세 신학에서 지옥은 ‘신적 질서’를 거부한 자가 이르는 ‘자연적 귀결’이다. 죄인은 자신의 행위가 자초한 위치로 스스로 떨어질 뿐이다. 심연은 자기 파괴적 선택의 결과일 뿐이다.
현대는 지옥을 믿지 않는다. 그런 ‘초자연적 장소’는 지식의 영역에서 추방됐다. 하지만 살면서 ‘지옥 같은 상태’를 경험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사회적으로 고립될 때, 무의미의 늪에 빠질 때, 관계가 단절될 때 ‘빛의 부재’, 심연의 어둠을 경험한다. 현대 철학자 카뮈, 에리히 프롬, 장 폴 사르트르가 말하는 ‘부재의 감각’ ‘무의미’ ‘실존적 고독’이 중세 신학의 신적 광휘의 부재의 필연적인 귀결인 지옥의 현대적 번역이다. 지옥은 어둠이 아니라 ‘빛이 없음’이다. 보나이우토의 지옥이 현대인의 심리의 생생한 은유로 읽힐 수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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