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반도체, 바이오, 원자력 등 신성장 산업 육성을 위한 각국의 첨단기술 경쟁이 뜨겁다. 재미 한인 공학자이자 2017년 아시아인으로는 최초로 미국 중부의 명문 주립대인 미주리대 총괄 사령탑에 오른 최문영 총장은 지난달 방한 중 서울경제신문과 만나 “기술 발전을 위해서는 더 많은 연구자들에게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지는 ‘연구의 민주화’가 이뤄져야 한다”며 “어디서 싹틀지 모를 미래 인재와 혁신 능력을 키우려면 성공률에 따른 점수표를 매기지 않는 정부의 연구개발(R&D) 지원이 활성화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 총장은 “기술 개발과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R&D 역량과 우수 인재 양성 능력을 갖는 대학과 산업계의 ‘윈윈’ 협력이 중요하다”면서 “미주리대는 미국 내 최대 규모의 산학 협력을 통해 재정을 확립하고 지역 경제 발전에 이바지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글로벌 제약사 노바티스에 방사성동위원소를 독점 공급하는 미주리대는 최근 20㎿ 차세대 연구용 원자로(NextGen MURR) 건설의 초기 설계 파트너로 한국원자력연구원·현대엔지니어링 컨소시엄을 선정해 주목을 끈 바 있다.
-미국의 높은 성장 능력이 혁신 역량에서 비롯됐다는 지적이 많다. 한국의 혁신력을 어떻게 평가하나.
△미국이 한국보다 높은 경제성장률을 달성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의 혁신 능력은 놀라운 수준이다. 한국 기업과 사회는 전 세계의 우수한 기술을 흡수하고 이를 새롭게 적용해 첨단 정보기술(IT) 인프라와 e커머스, 교통 인프라 등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발전시켜왔다. 이는 미국이 배워야 할 부분이다. 기술을 구현하고 사회에 긍정적인 변화를 준다는 면에서는 한국이 미국보다 앞서 있다고 생각한다. 단적인 예가 한국의 전국 고속철도 시스템인 KTX다. 미국은 관료주의에 막혀 아직 전국 어디에도 고속철을 도입하지 못하고 있다.
-AI를 비롯한 첨단 분야에서는 미국과의 경쟁력 격차가 벌어지고 있지 않나.
△기술혁명을 하나의 역사적 과정으로 봤을 때 지금은 ‘AI 혁명’의 단계다. 120년 전의 자동차 혁명과 20세기 후반 인터넷 혁명을 겪은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과거 신기술을 이끌었던 많은 혁신 기업들이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컴퓨터 산업을 주름잡던 컴팩, 휴렛팩커드(HP) 등이 삼성·소니에 시장을 내주고 인터넷 서비스의 선구자였던 야후도 도태됐다. 같은 일이 AI 분야에서도 벌어질 수 있다. 후발 기업들은 선발 주자의 혁신과 시행착오를 지켜보며 가장 우수한 기술을 가려내고 최적의 투자 전략을 수립할 수 있다는 이점을 갖는다. ‘퍼스트 무버(first mover)’가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기업은 아니다. ‘퍼스트 무버가 되지 않기(Don’t be the first mover)’도 중요한 전략적 가치가 있다고 본다.
-미국이 수많은 기술혁신의 선구자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는가.
△미국의 혁신 성공은 실리콘밸리식 사고의 실행에서 비롯된 것이다. 실리콘밸리에서는 100번을 실패하더라도 단 한번의 성공으로 ‘유니콘(기업가치 10억 달러 이상의 비상장 스타트업)’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성공이다. 실패를 두려워하고 안정을 추구하느라 도전과 모험을 회피하면 혁신을 이룰 수 없다. 혁신 생태계를 이루려면 그런 사고방식과 문화가 저변에 깔려야 한다.
-문화가 단기간에 바뀌기는 어렵다. 정책적으로 혁신을 뒷받침할 방법이 있다면.
△맞는 말이다. 오랜 기간이 소요되는 사고방식의 전환이 이뤄지기까지는 혁신 활동에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정책적 접근이 중요하다. 미국은 정부 차원에서 기업에 제공하는 R&D 세제 혜택과 대학 연구 지원이 왕성하다. 전 세계에서 대학 연구에 가장 많은 지원금을 투입한다. 하지만 규모보다 중요한 것은 정부 기금 지원을 받은 연구가 즉각적인 성과를 내지 못해도 성공률에 따른 점수표를 매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가령 미국 국립보건원(NIH)은 연간 450억 달러(약 64조 2000억 원)의 예산을 집행해 전국 대학을 중심으로 생명과학·보건의료 연구 활동을 지원하는데 보조금을 받은 수혜자가 특허 취득이나 기술 개발 등 가시적 성과를 내지 못해도 미래 인재 양성 등 잠재적 가능성이 인정되면 계속 지원을 받을 수 있다. 인재와 혁신은 어디서 싹틀지 모르기 때문이다.
-과학기술 발전을 위해 한국의 연구 환경이 어떻게 개선돼야 하나.
△일반론적으로 말하자면 더 많은 연구자들에게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지는 ‘연구의 민주화’가 이뤄져야 한다. 연구자들이 더 큰 리스크를 감수할 수 있고 더 많은 연구자들에게 정부 지원의 기회가 주어져야 더 많은 차세대 연구자들을 양성할 수 있다. 혁신을 위해서는 과학기술 분야에서 더 많은 인재 양성이 필수다. 한국의 연구 환경을 직접 경험한 적은 없지만 미국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러 오는 학생 수가 예전보다 10~20% 줄어든 것은 한국 내 교육 프로그램과 연구 수준이 그만큼 높아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30년 전 원자핵공학 박사 학위를 받으려면 미국으로 유학을 와야 했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다. 전기공학·반도체 분야도 그렇다. 이제는 더 많은 미국 학생들이 연구뿐만 아니라 제조와 기술 접목을 배우기 위해 한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을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
-과학기술 개발과 경제성장을 위한 대학의 역할은 무엇인가.
△대학이 사회에 실질적 영향을 주기 위해서는 산업계와의 협력이 중요하다고 본다. 그래야 대학 연구가 ‘연구를 위한 연구’에 그치지 않고 산업 발전과 경제성장에 기여할 수 있다. 기업이 대학과의 파트너십에서 가치를 발견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수준 높은 R&D를 통한 제품 개발과 좋은 인재 확보다. 기업이 원하는 우수한 인재를 키우고 고도의 R&D를 제공할 수 있는 대학은 활발한 산학 협력을 통해 연구 발전과 인재 양성의 중요한 재원을 확보할 수 있는 윈윈 구도가 형성된다.
-미주리대는 생명공학 등 첨단 분야에서 산학 협력이 왕성한 것으로 안다.
△기업과의 파트너십을 활성화하기 위해 연구의 결과물인 특허 소유권에 초점을 두지 않고 기업과의 공동 특허 등록으로 이익을 공유해 윈윈하는 전략을 택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자체 보유한 특허 수가 아니라 기업과의 협력을 통한 수익 창출이다. 총장으로 취임한 2017년 당시 연간 2000만 달러 규모였던 산학 협력 수익이 지금은 1억 2500만 달러 규모에 달한다. 스탠퍼드대나 매사추세츠공대(MIT)의 특허 수익이 연간 5000만 달러 규모다. 산학 협력 규모는 미국의 주요 대학 가운데 가장 클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산학 협력 사례는 무엇인가.
△2021년 노바티스와의 파트너십이다. 추적 항암 치료제의 핵심 물질인 방사성동위원소를 노바티스에 독점 공급하는 계약이다. 루테튬-177이라는 이 동위원소는 미국에서 미주리대가 보유한 10㎿ 연구용 원자로에서 유일하게 생산되고 있다. 미국 대학 중 두 번째로 큰 MIT의 연구용 원자로가 5㎿ 규모다. 여기서 나아가 20㎿ 차세대 연구용 원자로를 건설하는 것이 현재 미주리대의 최대 과제다. 한국원자력연구원과 현대엔지니어링 등이 참여하는 한국 컨소시엄이 이 중차대한 사업의 초기 설계 파트너다.
-관세 협상 타결을 계기로 한미 산업 협력의 기반이 더욱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기술 연구 분야에서 한미가 윈윈할 협력 모델을 어떻게 구축해야겠는가.
△한미뿐 아니라 세계 각국이 협력을 통한 혁신을 이루기 위해서는 상호 존중이 기반이 돼야 한다. 서로 다른 시각과 기술적인 능력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 성공적인 파트너십의 첫걸음이다. 66년 전 미국으로부터 원자로 기술을 도입한 한국이 미주리대의 차세대 원자로 건설을 위한 국제 경쟁입찰에서 미국·프랑스 기업 등을 제치고 기술 역수출을 할 수 있던 것은 과거가 아닌 현재 성과를 토대로 한국의 인재와 기관·기술력 등에 대해 공정한 평가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외부에서 바라볼 때 한국 경제의 약점은 무엇인가.
△계급적 사회구조와 저출산 문제는 한국 사회가 장기적으로 풀어가야 할 과제다. 그런데 저출산 해소의 해법이 될 수도 있는 이민자들이 한국 사회의 일원으로 충분히 받아들여지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12·3 계엄 사태 이후 심화하고 있는 정치적 양극화도 우려스럽다. 물론 정치 양극화는 미국은 물론 세계 전반에서 확산되는 문제이기는 하다.
-젊은 세대에서도 확산되는 극단주의적 양극화를 막으려면 대학의 역할이 중요해 보인다.
△매우 중요하다. 대학은 전공 공부나 취업 준비 등 경제적으로 생산력을 양성하는 곳인 동시에 새로운 시각과 개념·아이디어를 접해 시야를 넓히고 유연한 사고를 함양해야 하는 곳이다. 대학에 입학해서 떠날 때까지 달라진 생각이 없다면 배운 게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충분한 대화와 토론 과정을 거쳐 민주 사회의 일원으로서 기여할 수 있는 시민을 배출하는 것이야말로 대학의 중요한 책무다.
◇He is…
1964년 서울에서 태어나 1973년 미국 오하이오주로 이주했다. 일리노이대 어배너섐페인에서 공학 학사 학위를 취득하고 프린스턴대에서 기계 및 항공우주공학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받았다. 시카고 일리노이대 부교수를 거쳐 드렉설대 기계공학과 학과장을 지냈으며 코네티컷대 공대 학장, 동 대학 교무처장 겸 부총장을 역임했다. 2017년 아시아인 최초로 약 7만 5000명이 재학하는 미주리대 4개 캠퍼스 총괄 총장으로 임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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