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전 세계에 인공지능(AI) 투자 열풍이 불어닥치며 올 하반기부터 미국 뉴욕증권거래소(NYSE)가 100년 넘게 유지하던 ‘세계 최대 증권거래소’ 지위를 잃게 됐다. 나스닥 증권거래소가 지난 6월부터 시가총액 기준으로 뉴욕증권거래소를 추월하면서 세계 최대 거래소 지위를 꿰찬 까닭이다. 나스닥은 오늘날 엔비디아·마이크로소프트·테슬라·애플·아마존·알파벳(구글의 모회사)·메타(페이스북의 모회사) 등 이른바 ‘매그니피센트7(M7)’을 앞세워 혁신과 성장을 상징하는 거래소로 자리 잡고 한국과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 투자 자금을 쓸어담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미국 최대 유통 업체이자 뉴욕증권거래소에서 세 번째로 시총 규모가 큰 월마트까지 AI 기업으로 변신을 예고하며 다음달 9일부터 나스닥시장으로 이전하겠다고 밝혔다. 월가에서는 AI나 자율주행 등 혁신 기술이 글로벌 투자의 중심으로 자리잡을수록 나스닥과 뉴욕증권거래소 간 시총 격차는 더 벌어질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한국보다 훨씬 큰 경제 대국의 자본시장이 전통 제조·금융·유통 회사가 아닌 기술 벤처 기업 위주로 커지는 점을 우리 역시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나스닥, ‘AI 열풍’ 등에 업고 6월부터 NYSE 시총 추월…107년 만에 세계 최대 거래소 교체
서울경제신문이 22일 세계거래소연맹(WFE) 통계를 분석한 바에 따르면 나스닥의 시총은 6월 말 31조 9635억 5975만 달러(약 4경 7038조 원)를 기록해 30조 8384억 849만 달러(약 4경 5382조 원) 규모의 뉴욕증권거래소를 처음 제쳤다. 나스닥의 시총은 10월 말 35조 6731억 8469만 달러(약 5경 2497조 원)까지 불어 뉴욕증권거래소(32조 3129억 9526만 달러)와의 격차를 점점 벌렸다. 나스닥이 이달까지 6개월째 명실상부한 세계 최대 거래소로 군림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상하기 힘들었던 일이다. WFE에 따르면 나스닥의 시총은 6년 전인 2019년 7월까지만 하더라도 11조 달러대 규모로 24조 달러가 넘었던 뉴욕증권거래소의 절반에도 못미쳤다. 글로벌 유동 자금이 대거 풀리고 비대면 기술이 각광을 받던 2020~2021년 코로나19 대유행(팬데믹) 시기에도 뉴욕증권거래소 시총은 나스닥보다 3조~6조 달러 정도 더 많은 수준을 유지했다.
상황은 챗GPT가 처음 일반 대중에게 공개된 2022년 11월 30일을 기점으로 반전되기 시작했다. 챗GPT의 등장 이후 AI 투자 열풍이 불면서 나스닥은 시총은 뉴욕증권거래소와의 규모 격차를 조금씩 좁혀 나갔다. 두 증권사 간 시총 차이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관세 정책을 발표한 여파로 증시가 폭락했던 지난 4월 한때 4조 달러 이상까지 다시 벌어졌지만, 결국 두 달 만에 역전됐다.
앞서 뉴욕증권거래소는 100년 이상 전 세계 최대 시총을 자랑하며 글로벌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노릇을 했다. 위치도 맨해튼 월가의 심장부에 있는 덕분에 뉴욕 증시는 곧 뉴욕증권거래소라는 등식으로 통했다. 현재 뉴욕증권거래소 상장 회사는 총 2400여 곳이다. 대표 기업으로는 코카콜라, 코스트코, 마스터카드, 나이키, 맥도널드 등이 있다. 주요 상장사 상당수가 연식이 오래되고 현금 흐름이 좋은 금융·제조·유통 우량 대기업이다.
뉴욕증권거래소는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거래소다. 1792년 24명의 거래 중개인들이 월가의 버튼우드 나무 그늘 아래에 모여 맺은 주식시장 규제·수수료율 합의인 ‘버튼우드 협정’을 조직의 기원으로 삼는다. 뉴욕거래소가 실제 거래소로서 기능하기 시작한 것은 1817년이다. 현 뉴욕증권거래소라는 이름을 갖춘 때는 1863년이다.
뉴욕증권거래소가 세계 최대 거래소가 된 시점은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인 1918년께로 추정된다. 그전까지는 대영제국의 광대한 식민지를 기반으로 둔 영국의 런던증권거래소(LSE)가 세계 최대 거래소였다. 런던증권거래소는 제1차 세계대전 때 유럽 지역이 전쟁터로 초토화된 탓에 세계 금융의 중심지 역할을 뉴욕증권거래소로 넘겼다. 본토가 전쟁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았던 미국은 막대한 군수 물자 특수에 힘입어 이때부터 세계 경제 패권 국가가 되는 기초를 다졌다.
1920년대 후반까지 압도적인 세계 1등 거래소로 부상했던 뉴욕증권거래소의 시총 규모는 1929~1933년 대공황을 겪으며 런던증권거래소와 다시 큰 차이를 보이지 않게 된다. 그러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40년대부터 미국 경제가 급속히 성장하면서 다른 지역은 영원히 따라잡지 못할 막강한 최대 거래소로서 자리를 굳혔다.
1971년 벤처 기업 위한 자동 거래 시스템으로 출범…‘2부 리그’ 코스닥과 다른 길
뉴욕증권거래소는 1940년대 제2차 세계대전과 이후 이어진 냉전, 1960년대 베트남 전쟁, 1970년대 오일 파동 등 여러 부침을 겪으면서도 2020년대까지 최고 거래소의 지위를 한 번도 잃지 않았다.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지금까지 내내 전 세계 최대 경제 대국으로 존재한 까닭이다. 일본 경제에 거품이 잔뜩 꼈던 1980년대 후반 일시적으로 도쿄증권거래소(TSE)의 명목 시총이 뉴욕증권거래소를 추월한 적은 있다. 그때도 일본 기업 특유의 상호출자 중복 계산분을 제외하면 실질적인 시총 1위는 뉴욕증권거래소였다.
뉴욕증권거래소의 107년 아성을 처음으로 확실하게 넘어선 곳은 결국 미국 내 경쟁자인 나스닥이 됐다. 나스닥은 뉴욕증권거래소와는 다른 자동 거래 시스템을 앞세워 1971년 2월 8일 창립됐다. 출범 초기부터 벤처 기업이나 정보기술(IT) 회사들의 자금 조달을 돕는 역할을 했다.
나스닥은 뉴욕증권거래소와 다르게 물리적인 거래소를 보유하지 않는다. 투자자와 시장조성자들이 데이터센터 거래 시스템을 통해 주식을 직접 매매한다. 이는 지금까지 시장조성자가 전통적인 경매 방식으로 주식 거래를 중개하는 뉴욕증권거래소와는 크게 차별화되는 부분이다. 나스닥은 본래 월가 근처에 있던 본사도 2019년부터 맨해튼 타임스퀘어로 옮겼다.
상장 기업은 뉴욕증권거래소보다 많은 4000여 곳에 달한다. 주식 유동성, 수수료, 주주 수, 시총, 실적 등 상장 요건이 뉴욕증권거래소보다 낮기에 그렇다. 상장사 대다수가 당장의 현금 흐름은 좋지 않지만 미래 성장성은 높은 기업들이다.
나스닥은 21세기 AI 혁명을 지렛대로 M7을 앞세워 뉴욕증권거래소의 규모를 빠르게 따라잡기 시작했다. 월가가 M7 등 혁신 기업을 중심으로 투자를 늘리면서 전 세계가 나스닥에 뭉칫돈을 쏟았다. 어느덧 나스닥의 시총 1위 기업은 전 세계 최대 가치 회사와 동일어가 됐다. 급기야 나스닥 대장주인 엔비디아의 시총 규모는 지난달 29일 5조 달러(약 7100조 원)를 넘어서며 세계 3위 경제대국인 독일의 국내총생산(GDP)까지 추월하기도 했다. 200조 원이 넘는 한국 개인투자자들의 현 미국 주식 보유액 대부분도 뉴욕증권거래소가 아닌 나스닥에 쏠려 있다.
나스닥과 뉴욕증권거래소 간 관계는 완전한 ‘남남’이자 경쟁 상대라는 점에서 한국의 코스피와 코스닥시장과는 확연히 다르다. 코스닥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출범할 때부터 한국판 나스닥을 표방한 시장이다. 1999년 IT 열풍에 힘입어 장내 시장으로 전환하면서 한국의 혁신 벤처기업들의 요람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
문제는 2004년 증권거래소(현 한국거래소(KRX))에 인수되면서부터 시작됐다. 미국으로 따지면 뉴욕증권거래소와 나스닥을 한 기관이 운영하는 꼴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코스피는 ‘1부 리그’, 코스닥은 ‘2부 리그’라는 인식이 뿌리 내렸다. 한국의 경제가 미국과 달리 혁신 서비스보다는 삼성전자(005930), LG(003550), 현대차(005380), SK하이닉스(000660) 등 전통 제조 기업 중심으로 유지되고 있다는 점도 코스닥에는 불리한 여건이 됐다. 지금도 외국인과 기관투자가들은 코스닥이 아닌 코스피 위주로만 자금을 대고 있다. 셀트리온(068270), 네이버(NAVER(035420)), 카카오(035720) 등 코스닥 시총 상위주가 된 대기업 상당수가 상장 요건만 갖추면 앞다퉈 코스피로 짐을 싸고 도망간 이유다.
“나도 AI 기업” 시총 4위 월마트까지 나스닥으로…거품론, 금리, 침체 등은 변수
이달 20일(현지 시간) 월마트의 이전 상장 계획 발표는 뉴욕증권거래소에 대한 나스닥의 승리를 다시 한 번 입증하는 효과를 냈다. 1972년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한 월마트는 20일 3분기 실적 공개와 함께 다음달 9일부터 나스닥으로 53년 만에 이전 상장한다는 방침을 밝혔다. 월마트의 뉴욕증권거래소 시총은 21일 기준 8397억 68만 달러로 미국주식예탁증서(ADR) 형태로 상장된 대만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기업 TSMC, 제약사 일라이릴리에 이어 3위 규모에 해당한다. 뉴욕증권거래소로 옮긴 역대 모든 기업 가운데 압도적으로 시총이 큰 회사다. 나스닥에서는 엔비디아·애플·마이크로소프트·아마존·알파벳·브로드컴·메타·테슬라에 이은 9~10위 정도로 평가받을 수 있는 덩치다. 월마트가 나스닥으로 올 경우 비금융 기업 100개로 구성된 나스닥100지수에도 편입될 수 있다.
월마트의 나스닥 이전은 이 회사가 최근 유통 사업에 AI 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면서 기술주로서 더 많은 자금을 끌어오겠다는 목적이 실린 결단으로 풀이된다. 월마트는 심지어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효과와 미국 연방정부 셧다운(일시적 업무정지)이 겹친 3분기에도 호실적을 거뒀다고 밝혔다. 저렴한 상품을 위주로 판매하는 기업인 만큼 3분기에 부진한 실적을 거둔 홈디포, 타깃 등과 달리 물가 상승이 외려 호재가 됐다. 월마트의 3분기 순이익은 61억 달러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4%나 증가했다. 월마트는 올 연간 매출도 지난해보다 4.80∼5.10% 증가할 것으로 예상했다. 이는 3개월 전 높여 잡았던 3.75∼4.75%보다 더 나아진 숫자였다. 존 데이비드 레이니 월마트 최고재무책임자(CFO)는 이날 CNBC 인터뷰에서 “고소득층에서 시장 점유율 확대 현상이 더욱 두드러졌다”며 “저소득층의 경우 지출 흐름이 다소 완만해져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다”고 말했다.
월마트의 변신은 이뿐만이 아니다. 이달 14일 월마트는 2013년 11월부터 12년 동안 회사를 이끈 더그 맥밀런 최고경영자(CEO)가 내년 2월 1일부터 물러나기로 했다는 발표도 내놓았다. 후임으로는 존 퍼너 현 미국 법인 CEO가 지명됐다. 그는 1993년 시간제 직원으로 입사해 2019년부터 월마트의 미국 법인 CEO를 맡고 있는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월마트의 이동을 계기로 세계 최대 거래소 지위는 한 동안 나스닥이 유지할 가능성이 커졌다. 다만 최근 월가에 확산하는 AI 거품론, 연방준비제도(Fed·연준) 금리 인하 속도 조절, 사모대출발(發) 부실 우려 확산 등은 나스닥지수의 장기 상승세에 부담을 주는 요인으로 꼽힌다. 실제 나스닥은 지난 19일 엔비디아의 3분기 실적 발표를 계기로 AI 거품론 논쟁에 또 다시 휩싸이며 20일과 21일 연속해서 극심한 변동 장세를 보였다. 만약 금리 인하까지 늦춰질 경우 초기 투자 자금은 많고 부채 부담은 큰 상장사가 대다수를 차지하는 시장 특성상 지수가 재차 하락 압박을 받을 수도 있다. 혹여 경제 침체라도 온다면 경기 민감주가 많은 만큼 시총 상위 거래소 지위를 뉴욕증권거래소에 곧바로 내어 줄 수도 있다.
어느 거래소가 세계 최고가 되든 한국 입장에서 더 주목해야 할 부분은 나스닥과 뉴욕증권거래소 간 건전한 경쟁 관계다. 기존 대기업이 자본시장 성장의 대부분을 주도하는 한국과 달리 미국은 신생 기업에 더 많은 자금을 공급하며 국가 경제 발전을 도모하고 있다. 한 나라의 미래 성장 잠재력이 결국 벤처 시장에서 비롯되는 점을 감안하면 한국도 간과할 수 없는 지점이다. 더욱이 미국은 한국보다도 경제 규모가 훨씬 큰 데도 이렇게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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