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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을 시스템으로 바꾼 기업이 시장을 이긴다 [이보형의 퍼블릭 어페어즈]

이보형 마콜컨설팅그룹 사장

사회 급변·정책 리스크 불확실성 커져  

삼성·SK, 반도체 국가 정책화 이끌고  

아모레, 규제준수 넘어 산업표준 제시

CJ대한통운, 비판 여론에 능동적 부응  

“기업 시스템 체화·정책 담론 선도해야”





정책은 사회의 변화를 반영한다. 여론이 바뀌고 시민의 기대가 달라질 때, 정부의 제도는 그 변화를 뒤따른다. 특히 최근의 정치환경과 여론환경은 정책의 더 빠른 변화를 원한다. 그래서 정책은 때때로 갑작스러워 보이지만, 사실은 사회가 이미 예고한 결과다. 문제는 기업이 그 신호를 읽지 못할 때 생긴다. 많은 기업이 시장 예측에 노력을 기울이지만, 정작 생존을 결정할 사회변화와 여론을 살피는 데는 소홀하다. 그러다 보니 사회변화에서 오는 불확실성이 오늘날 기업 리스크의 핵심이 되었다.

사회 변화로부터 오는 리스크를 여전히 대외 이미지의 문제로 보는 기업이 많다. 위기가 터지면 사과문을 내고, 메시지를 다듬으며 시간을 벌지만 이는 무너지는 건물에 페인트를 칠하는 것과 같다. 당장의 이미지 대응만으로는 시간을 벌 뿐, 신뢰를 쌓을 수는 없다. 신뢰는 문장의 솜씨가 아니라 시스템의 작동에서 비롯된다. 잘 쓰인 사과문은 감정을 진정시킬 수 있지만, 구조가 바뀌지 않으면 같은 위기가 반복된다. 메시지는 대응의 언어이지만, 시스템은 미래의 위기를 막는 예방의 언어다.

오늘날 기업이 살펴야 할 것은 말의 속도가 아니라 사회적 변화를 기업의 시스템으로 번역하는 능력, 그리고 그 위에서 정책 담론을 선도하는 리더십이다. 이것이 비시장 전략의 본질이다. 비시장 전략은 위기를 피하는 기술이 아니라, 사회의 변화를 제도로 번역하여 정책과 기업의 관계를 설계하는 전략적 언어다. 규제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기업은 늘 한 발 늦지만, 정책을 내부 시스템으로 내재화한 기업은 오히려 제도의 방향을 제시하고 시장을 선도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그 전환의 한 사례다. 반도체특별법 논의 과정에서 이들은 세제 혜택 논란의 한가운데 있었지만 수혜를 기다리지 않았다. 정부가 반도체를 국가전략산업으로 규정하자, 이들은 이를 산업 생태계 전체의 과제로 재해석했다. 인재 양성과 공급망 안정화라는 더 큰 담론을 병행하며, 대학·지방자치단체·협력사들과 협력 생태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인재양성 계약학과 설립 등 사회적 변화를 이끌었다. 삼성과 SK는 정책을 산업 전체의 담론으로 재해석하고 시장을 선도한 것이다.

아모레퍼시픽은 가습기살균제 사건 이후 강화되는 규제 속에서 이를 내재적 시스템으로 대응했다. 환경부가 생활화학제품 안전기준을 강화하자, 아모레는 모든 원료와 포장재, 공급망을 실시간으로 관리하는 화학물질 통합시스템(AP-CHEMS)을 구축했다. 사회와 정부의 요구를 기업 내부 시스템으로 흡수한 것이다. 규제 대응이 아니라, 규제의 언어를 경영의 언어로 통합한 결과였다. 그 과정에서 아모레는 ‘규제를 잘 지키는 기업’을 넘어 정책의 언어를 산업 표준으로 만든 기업이 되었다. 이제 아모레는 소비자뿐 아니라 정부, 언론, 시민단체 등으로부터 단순히 규제를 잘 지키는 기업이 아니라, 내부에서부터 규제를 예측하고 설계하는 믿을 수 있는 기업으로 인식된다.



CJ대한통운은 사회적 비판을 제도화로 바꾼 경우다. 2020년 택배기사 과로사 사태로 사회적 압력이 커지자, 회사는 공식 사과와 함께 ‘분류는 회사의 책임’이라 선언했다. 전국 터미널에 4000여 명의 분류 인력을 투입하고, 근로시간 실명제와 심야배송 제한을 도입했다. 정부가 법을 만들기 전에 사회가 요구한 제도를 먼저 실행한 셈이다. 이후 정부가 제정한 생활물류법은 이 현장 데이터를 정책모델로 반영했다. 비판에서 출발했지만 시스템의 변화로 응답하며 정책 설계의 일부가 된 것이다.

세 기업의 공통점은 명확하다. 그들은 정책을 단순히 따르지 않고, 제도의 취지를 내부 시스템에 결합해 기업 경쟁력의 일부로 만들었다. 이처럼 정책의 흐름을 내부 시스템으로 변환한 기업만이, 다음 변화를 예측하고 정책의 방향을 제안할 수 있다. 시장을 리드하는 힘은 정책을 먼저 이해한 시스템에서 비롯된다.

비시장 전략을 잘 이해하는 기업은 정부·시민사회·언론·투자자를 설득의 대상이 아닌 비시장환경의 참여자로 본다. 정부에는 데이터를, 시민사회에는 공공성을, 언론에는 투명성을, 투자자에는 일관된 가치를 제공한다. 기업이 이들을 제도 안에서 통합할 때 기업에 대한 믿음이 쌓인다.

정책은 사회변화에 따라 늘 바뀌지만, 시장과 비시장을 함께 결합하는 신뢰의 구조를 만들면 기업은 사회로부터 오는 불확실성을 신뢰로 바꿀 수 있다. 기업의 신뢰는 빠른 대응이 아니라 정책을 내부 시스템으로 바꾸는 기업의 언어, 새로운 정책 담론을 제시하는 리더십의 언어에서 비롯된다. 이제 시장을 지배하는 힘만큼 사회를 설계하는 힘도 기업경쟁력의 하나이다.

서경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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