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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투성이 사물도 내 그림에선 빛이 나죠"

구자승 8년 만에 개인전

사물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 포착

현실 너머 사유를 비추는 정물화

극사실주의에 동양화 여백 담아

인사동 선화랑서 총 50여점 공개

구자승 작가가 서울 인사동 선화랑에서 개막한 개인전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김경미 기자




구자승(84)의 정물화를 보는 것은 독특한 경험이다. 바구니 속 과일은 막 씻어낸 듯 윤기가 흐르고 화병 속 탐스러운 꽃송이는 눈부신 햇빛 아래 놓인 듯 찬란하다. 현실의 가장 아름다운 시간을 잘라 화폭에 가둔 듯한 그림이다. 형태는 손에 잡힐 듯 사실적이지만 ‘너무 사실적이라 오히려 비현실적인’ 긴장 속에서 그의 정물은 현실 너머의 사유를 비춘다.

극사실주의 화가 구자승의 개인전이 서울 인사동 선화랑에서 열리고 있다. 2017년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연 후 약 8년만에 열리는 본격적인 전시다. 회고전 이후 그려진 최근 작품을 중심으로 약 50점을 만날 수 있는 이번 전시는 특히 일상 속 사물을 주제로 한 ‘구자승표 정물화’에 포커스를 맞췄다.

서울 인사동 선화랑에서 개막한 구자승 개인전의 전시 전경. 김경미 기자


그의 그림을 채우는 것은 특별한 사물이 아니다. 메마른 나무 상자, 과일과 꽃, 오래된 백자 항아리, 바랜 주전자와 빈 술병, 할머니가 남긴 서간집, 부모님의 결혼 사진처럼 일상에서 흔하게 만나볼 수 있는 것들이다. 소머리나 양머리 같은 동물 머리뼈도 종종 등장하는데 “시간의 흐름을 떠올리게 해” 좋아한다는 게 작가의 설명이다.

구자승, ‘양머리가 있는 정물’. 사진 제공=선화랑




그러나 이들 평범한 소재가 화면 속에 자리하는 방식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그의 그림에서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압도적 사실성이지만 다시 들여다보면 사물이 뿜어내는 빛나는 아름다움에 놀라게 된다. 상자의 고운 나뭇결과 항아리를 매끈하게 감싸는 반짝이는 유약, 윤기가 흐르는 완벽한 형태의 과일, 유리잔에 비친 빛의 반사까지 손에 만져질 듯 정교하고 눈부시다. 작가는 “나는 정물을 통해 아름다움을 즐기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내가 일상에서 건져 올린 사물들은 실제로는 깨지기도 하고 때가 묻기도 한 지저분하고 어지러운 것들이지만 이런 상처를 치유하는 마음으로 그림을 그린다”며 “상처투성이의 아픈 사물이라도 내 손과 마음을 거쳐 다시 그려질 때는 본래 모습보다 온전하고 깨끗하게 표현돼 새로운 힘을 얻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구자승, ‘정물(2024)’. 사진 제공=선화랑


구자승, ‘함위에정물(2025)’. 사진 제공=선화랑


그의 정물이 남다른 또 하나는 여백이다. 작가는 “서양 정물화에서 여백을 챙긴다니 모순처럼 들리겠지만 나의 작품은 ‘내적 사유를 옹호하는 동양적 세계관’에 존재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의 정물화는 사물을 화면 가운데로 몰아넣는 경우가 많은데 넓은 여백을 펼쳐 즐기기 위해서다.

기물이 없는 빈 공간을 배경이 아니라 여백으로 완성하고자 독특한 작업 방식을 고수하기도 한다. 기물을 다 그린 후 배경을 채워 넣는 것이 아니라 화면의 한쪽 면에서 시작해 다른 면으로, 배경과 기물을 동시에 완성해가는 것이다. 작가는 “사물을 다 그린 후 배경을 칠하는 것은 훨씬 쉬운 방식이지만 그 대신 경계선이 뚜렷해 평면적 느낌이 강해진다”며 “평면이 아닌 공간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라고 설명했다.

가족 대대로 그림을 잘 그려 “화가는 내 운명”이라고 말하는 작가는 80여 평생 그림을 그렸다. 정물화뿐 아니라 인물화도 주특기로 삼성가 3대의 초상화와 역대 대통령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다. 그는 “여행을 잘 떠나기 위해 짐을 꾸리고 준비하던 게 지금까지의 인생이라면 이제는 기차에서 잘 내리기 위한 준비를 하는 단계”라면서도 여전히 붓을 멈추지 않고 있다. 작가는 “그동안 전시를 제대로 열지 못해 근질근질했다”며 앞으로도 신작으로 대중과 만나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전시는 25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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