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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봉 동아시아 출판사 대표 "쉽게 읽히는 책은 쉽게 잊혀…출판, 교양의 깊이 지켜야 생존"

[CEO&스토리] 한성봉 동아시아 출판사 대표

과학 대중서 꾸준히 내면서 시장 개척

궤도·김상욱·김대식 등 스타작가 발굴

전 국민이 책 읽는 시대는 이제 끝나

10~20% 독서인구 타깃이 출판 살길

순도높은 텍스트로 지적 유희 선사해야

새 브랜드 '물결점'으로 순수문학 실험

AI 활용해 '과학 문해력 사전' 집필도

한성봉 동아시아 출판사 사장. 성형주 기자




“출판계는 매년 ‘단군 이래 최대 불황’이라는 말을 달고 삽니다. 스마트폰 동영상이 책의 자리를 차지한 시대죠. 하지만 저는 여전히 출판의 본질, 즉 언어의 힘에서 길을 찾습니다.”

한성봉 동아시아 출판사 대표는 27일 서울경제신문과 만나 출판 업계의 위기와 관련해 이같이 말했다. 그는 “책은 언어의 집”이라고 단언했다. 유튜브가 교양을 전하고 인공지능(AI)이 텍스트를 생성해도 인간이 언어를 해석하고 사유하는 과정만은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책은 독자가 직접 돈을 내고 ‘기호’를 사서 ‘디코딩’의 과정을 거쳐 자기 가치 체계를 만드는 매체입니다. 가장 불편한 행위를 스스로 선택하는 사람들의 영역이죠. 저는 그 불편함이야말로 출판을 살릴 유일한 힘이라고 믿습니다.”

1998년 창립된 동아시아는 그 믿음을 꾸준히 실천해왔다. 과학과 인문, 바이오와 의학, 문학 등 출판의 여러 지층을 언어의 힘으로 연결해온 것이다.

동아시아가 국내 출판계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독특하다. 문학이나 아동 책이 대세를 이루는 가운데 뚝심 있게 과학 대중서를 내며 해당 시장을 개척해온 개성 있는 출판사다. 스타 작가에 의존하지 않고 작가를 스타로 키워왔다. 정재승의 ‘과학 콘서트’, 김대식의 ‘빅퀘스천’, 김상욱의 ‘떨림과 울림’, 김승섭의 ‘아픔이 길이 되려면’, 궤도의 ‘과학 허세’ 등이 대표적이다. 1만 부만 팔려도 ‘베스트셀러’라 불리는 시대에 10만 부 이상 팔린 책들이 수두룩하다. 그는 “인문적 감수성이 배어 있는 제목과 언어를 택했다”며 “독자에게 과학을 낯설지 않게, 그러나 가볍지 않게 다가가게 하려는 전략이었다”고 설명했다.

한 대표의 노력 덕분에 한때 비주류로 여겨졌던 과학 교양서가 이제 한 장르로 자리 잡았다. 그는 요즘처럼 AI 관련 서적이 쏟아지는 현실을 두고 “트렌드를 쫓는 출판은 경쟁력이 떨어진다”고 지적했다. 한 대표는 한때 출판을 ‘트렌드와 어젠다의 공배수’로 정의했지만 이제는 어젠다에 방점을 찍는다. “책은 발이 느린 매체입니다. 기획부터 출간까지 최소 1년은 기본이죠. 그래서 트렌드를 쫓으면 늘 뒤처질 수밖에 없습니다. 대신 우리는 어젠다를 고민하고 세웁니다. 1~2년 뒤 사회가 이야기하게 될 주제를 먼저 꺼내놓는 거죠.”

그는 실제로 양자역학 붐이 일기 1년여 전부터 기획을 시작해 올해 초 ‘양자역학의 역사’를 출간하며 대중화를 이끌었다. “당시만 해도 생소한 주제였지만 ‘이건 온다’는 확신이 있었어요. 출판은 결국 예측의 예술입니다.”

출판 불황 속에서 한 대표가 내세운 무기는 ‘책의 본령’에 충실하는 것이다. 그는 “전례 없는 미디어 혁명으로 문자로 이뤄진 책이 위기를 맞은 것은 사실”이라며 “전 국민이 책을 읽는 시대는 지났다. 이제는 책을 읽는 10~20%의 사람을 대상으로 언어가 줄 수 있는 지적 유희와 만족을 강화하는 것이 출판이 살 길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더욱 깊은 콘텐츠와 긴 호흡의 이야기를 통해 언어가 담을 수 있는 더 높은 차원의 담론을 제시하는 것이 출판의 무기가 될 것”이라며 “쉽고 편한 언어보다는 순도 높은 텍스트로 승부를 보겠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러한 언어 실험을 문학으로 확장했다. 새 문학 브랜드 ‘물결점’이 그 일환이다. 기존 장르문학 브랜드 ‘허블’과는 별개로 에세이와 일반 문학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이를 위해 지난해 김수영문학상 수상 편집자가 합류했다. 첫 작품은 하미나의 에세이다. ‘미쳐 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로 이름을 알린 1990년대생 여성 작가다. 한 대표는 “물결점은 이름 그대로 문자로 파문을 일으키려는 시도”라며 “소설·대본·에세이·시 등 순수 문학 전반에서 다양하고 신선한 실험을 할 것”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AI 역시 출판계에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본다. 한 대표는 “AI를 통해 언어의 장벽이 사라지고 물류 효율이 높아지면서 전 세계를 상대로 출판할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며 “한류 바람을 타고 국내 서적에 대한 해외의 관심도 높아졌다”고 말했다.

동시에 AI는 편집자의 능력을 배가시키는 도구이기도 하다. “기획력과 상상력이 있는 편집자에게 AI는 날개를 달아주는 존재입니다. 좋은 질문을 던질 줄 아는 사람이 AI를 잘 활용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원고를 기다렸지만 이제는 스스로 콘텐츠를 창작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편집부 명의의 책’이 자연스러운 시대입니다.” 동아시아 출판사의 편집부는 AI를 활용해 ‘과학 문해력 사전’을 집필 중이다. 초중생이 과학을 어려워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한자어로 된 용어들이라는 점에 착안해 과학 용어의 어원과 개념을 일목요연하게 알려주는 책이다. 내년부터 시리즈로 나올 예정이다.

동아시아 출판사는 1년에 50권이 넘는 책을 꾸준히 낸다. 한 주에 한 권 이상 세상에 내놓는 셈이다. 보통 초판 2000부를 다 팔기도 어려운 시절에 이런 성과를 올리는 비결은 무엇일까. 그는 좋은 저자 발굴과 함께 편집자 육성을 꼽았다. “좋은 책은 좋은 편집자가 만듭니다. 편집자가 저자의 오류를 잡고, 부족한 논리를 채우며, 문장을 매만질 줄 알아야 하죠. 그래서 우리 편집자들은 깐깐하기로 유명합니다. 그 깐깐함이 출판의 품질을 지켜주는 장치예요.”

그는 특히 기존 출판 문법에 익숙하지 않은 젊은 편집자들을 선호한다. 간호사나 엔지니어 출신 편집자들이 이곳에서 활약할 수 있는 것도 그의 이런 철학 덕분이다.

저자 발굴 역시 중요하다. 동아시아에서 출간되는 책의 80%가 국내 저자 작품이다. 외국 저서를 번역 출판하면 리스크는 줄일 수 있다. 이미 원고의 품질과 독자 반응이 검증된 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내 저자의 경우 함께 기획하며 만들어가는 과정에 의미가 있고 요즘은 저자가 직접 유튜브 등을 통해 마케팅에 나서는 효과도 크다.

동아시아는 궤도·김상욱·김승섭·천선란·김초엽 등 다수의 필자를 일찍 발굴했다. 그가 궤도와 인연을 맺은 것은 유튜브 이전, 그가 사회 초년생이던 시절이었다. “페임랩을 만들던 젊은 직원이 눈에 띄었어요. ‘당신은 쓸 수 있다’고 설득했죠. 몇 년이 걸렸지만 결국 책이 나왔습니다.” 한 대표는 “저자에게 ‘당신이 뭘 쓰면 잘 쓸 수 있는가’를 찾아주는 일이 편집자의 몫”이라고 덧붙였다.

요즘에는 저자 발굴보다 선별이 더 중요해졌다. 원고를 들고 출판사의 문을 두드리는 예비 저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오랜 업력과 평판을 갖춘 출판사의 경쟁력이 높아지는 이유다.

한 대표는 출판의 미래 역시 양보다 질, 속도보다 깊이에 있다고 본다. “책이 쉽게 읽히면 재미있지만 쉽게 잊힙니다. 이제는 더 어렵고, 더 정밀한 책이 살아남을 겁니다. 출판이 다시 깊이를 고민해야 합니다. 그것이 책의 존재 이유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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