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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민의 미디어 풍경] 시성비와 사람의 시간

■정재민 KAIST 문술미래전략대학원 교수

빠르게 듣고 보는 게 일상인 세상

이해력·만족도 등은 현저히 떨어져

제 속도로 봐야 제대로 된 경험 가능





출근길 지하철 40분. 뉴스레터 2개를 훑고, 경제 팟캐스트 30분 분량을 2배속으로 듣고, 유튜브 자기계발 강의 20분을 1.75배속으로 시청한다. 화면 오른쪽 아래 ‘1.75x’ 표시가 떠 있는 동안 뿌듯함을 느낀다. ‘정보 ROI(투자 대비 수익률)’가 높아진 것 같다. 누군가의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다. ‘시간 대비 성능 비율’, 즉 ‘시성비’는 이제 Z세대와 밀레니얼의 일상 언어다. 빨리 듣기, 빨리 읽기, 빨리 보기가 기본이다. 드라마와 영화는 결말 포함 ‘20분 요약’으로, 책은 ‘핵심 정리’로, 논문은 ‘인공지능(AI) 요약’으로 해결한다. 하지만 그만큼 시간을 얻은 걸까. 빨리 보고 빨리 듣고 빨리 읽으면서 우리는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고 있나.

한 연구에서 대학생들에게 강의 영상을 1배와 1.5배속으로 보여준 후 퀴즈를 봤다. 결과는 1.5배속 시청 집단의 점수가 확연하게 낮았다. 속도가 빨라지면 의미를 새기고 연결하는 데 필요한 ‘숨 고르기’ 시간이 줄어들게 마련이다. 결국 정보의 이해와 회상에 불리하게 작용한다. 특히 새롭고 복잡한 내용일수록 빠른 재생은 뇌 부하를 높여 이해력 증진을 낮춘다. 더 큰 문제는 우리가 그 손실을 자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빠르게 듣고 빠르게 넘길수록 머릿속에서는 정보가 ‘유창하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진다. 마치 다 아는 듯한 착각, 이른바 ‘유창성의 착각’이다. 그것은 이해가 아니라 표면적 스캔에 불과하다.



빨리 보기와 세트로 등장하는 메뉴는 건너뛰기다. 정상 속도보다 더 빨리 보면서 10초씩 건너뛰기도 한다. 조금이라도 지루하다 싶으면 아예 바로 다른 영상으로 넘어간다. 캐나다 토론토대 연구팀은 실험을 통해 빨리 감기와 건너뛰기 시청이 만족도와 몰입감을 현저하게 떨어뜨린다는 사실을 규명했다. 시간을 아끼고 지루함을 피하기 위한 효율적 선택이 오히려 경험의 질을 떨어뜨리고 불만족스러운 상태를 만든다. 빠르게 소비하는 습관은 우리를 더 조급하게 만들고 더 쉽게 지루함을 느끼게 만든다. 주의력이 파편화되고 우리의 경험도, 일상도 파편화된다.

왜 이런 역설이 발생하는 걸까. 빨리 보고 건너뛴다는 것은 현재 콘텐츠에 완전히 몰입하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극장에 가면 꼼짝 않고 집중해서 영화를 보게 된다. 강제 몰입의 시간이다. 내가 속도를 통제할 수 없는 환경이기 때문이다. 제 속도로 봐야 배우의 눈빛, 카메라의 느린 이동, 장면 전환의 포즈, 음악의 여운. 이 모든 것을 제대로 경험할 수 있다.

초고속의 시대, 숨이 가쁘다. 속도를 늦춰보자. 느림은 뒤처짐이 아니라 회복이다. 책 한 권 들고 카페에 가서 두 시간 읽어 보고, 극장가서 영화도 보고, 드라마 한 편 끝까지 제대로 보고, 산책하며 팟캐스트 1배속으로 들어보고, 밥이 익어가는 시간을 즐기는 것. ‘적게 느리게 소비하는 것’이 ‘많이 제대로 경험하는 것’이다. 그 느린 리듬 속에서 생각이 자라고 감정이 숨을 쉰다. 2배속은 기계의 시간이고 1배속이 사람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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