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가 대법관 증원을 골자로 한 사법 개혁에 속도를 내고 있으나 법조계 안팎에서는 인력 확충 중심의 개혁이 ‘임시 처방’에 그칠 수 있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독일·프랑스·일본 등 주요 대륙법(성문법 중심의 해석 체계) 국가는 사건 적체로 인한 사법부 신뢰 저하 문제를 회복하기 위해 법관 증원 대신 상고허가제·협업심리제 등 절차 개혁을 도입했기 때문이다. 대법원이 모든 사건을 처리하는 기관이 아니라 ‘법리 기준을 세우는 최고심’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제도를 설계한 것이다.
23일 법조계에 따르면 백혜련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표 발의한 법원조직법 일부개정법률안이 이달 21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회부됐다. 법사위 심사와 본회의 의결을 거쳐 최종 확정 절차를 밟는다.
이번 사법 개혁안의 핵심은 결국 대법관 증원이다. 독일 역시 2010년대부터 대법원으로 몰리는 사건이 급증하자 법관 증원을 고심했다. 하지만 독일 법무부는 인력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시스템 개혁에 나섰다. 이에 따라 지난해 10월부터 연방대법원(BGH) 내 ‘대표 판결 제도(리딩 디시전·Leading Decision)’를 도입해 수천 건의 사건 중 대표 사례 하나를 골라 법 해석 기준을 세우고 나머지 유사 사건은 하급심이 그 기준에 따라 판단하도록 했다. 법리 분석을 담당하는 학술보좌관 인력도 확대했다.
반면 국회 사법개혁특별위원회의 개혁안은 상고심 절차 개선보다 법관 증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대법원으로의 사건 집중이 계속될 경우 결국 또다시 법관 증원이 필요해지는 ‘증원→적체→재증원’의 구조적 모순에 직면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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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역시 법관 증원 대신 상고허가제 도입과 조직 개편을 병행했다. 프랑스 대법원은 2021년 상고심 제도 전반에 대한 ‘2030 비전 계획’을 발표해 향후 10년간의 심리 구조와 조직 개혁 방향을 제시했다. 기존 6개 전문 부서(민사1·2·3, 상사, 사회, 형사)를 유지하되 부서 간 협업을 제도화한 ‘협업심리(co-jugement)’ 절차를 도입해 절차적 투명성과 전문성을 강화했다. 예를 들어 근로계약 해지 사건의 경우 노동 관련 쟁점은 사회부가, 계약 쟁점은 상사부가 함께 심리한다.
이와 비교해 현재 추진 중인 사법 개혁안은 대법원 내 연합부 신설안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연합부는 여러 부가 함께 사건을 심리하도록 하는 조직으로 복잡한 쟁점이나 부서 간 견해가 엇갈릴 때 공동으로 판단한다. 표면상으로는 프랑스의 협업 심리 절차와 유사하지만 그 효과는 다르다. 프랑스는 다양한 전문 부서가 상시적으로 협업하도록 제도를 설계한 반면 한국의 연합부는 개별 사건에 한정된 임시 협의체에 가깝다.
일본은 상고허가제를 도입한 대표적인 국가다. 한국은 모든 상고 사건을 접수한 뒤 심리할 필요가 없는 사건을 걸러내는 심리 불속행 제도를 두고 있지만 일본은 상고 요청 건 가운데 심리할 사건을 선별하는 ‘허가제’를 운영하고 있다. 또 사건의 법리와 쟁점을 미리 분석하는 ‘조사관(법률연구관)’ 제도를 두고 지식재산권·기술 분야 등 전문 사건에서 심리의 효율성과 전문성을 높이고 있다. 국내 대법원에도 재판연구관 제도가 있지만 이번 사법 개혁안에는 대법관 증원 외에 연구관 인력 확충이나 역할 강화 방안은 아예 빠져 있다.
결국 이번 사법 개혁에서도 법관 증원에 앞서 상고허가제 혹은 대법관 조직 개편 등 시스템 개선이 병행돼야 한다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현직 부장판사는 “민주주의는 다수결이지만 법치는 충분한 논의와 숙의를 전제로 한다”며 “대법관 증원 이후 전원합의체가 형식적으로 운영되면 오히려 판단의 균형이 흔들릴 수 있다”고 밝혔다. 다만 법조계 일각에서는 법관 증원이 사법부 신뢰 회복을 위해 불가피하다는 의견도 나온다. 한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결국 사법의 정치화를 막기 위한 제도 개혁이 필요한 상황”이라면서도 “(사법 신뢰 회복을) 대법관 증원으로 해결할 수 있을지는 충분한 논의를 거쳐 고민할 문제”라고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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