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30일 큰 틀의 합의 이후 교착 상태에 빠졌던 한미 무역협상이 이달 말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전후한 극적 타결을 목표로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한국과 미국은 무역협상 막판 과정에서 대미 투자 패키지 구체화, 국내 외환시장 안정화 방안 등을 집중적으로 조율할 것으로 보인다.
스콧 베선트 재무부 장관은 15일(현지 시간) 워싱턴DC 재무부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한국의 대미 투자 약속과 관련한 이견이 해소될 것으로 예상하느냐’는 취재진 질문에 “해소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며 앞으로 열흘 안에 무역협상 결과를 낼 수 있다고 공언했다. 베선트 장관은 “우리는 현재 대화하고 있고 향후 10일 안으로 무엇인가를 예상한다”고 덧붙였다. 한미 양국이 3500억 달러(약 500조 원) 규모의 대미 투자 구성 방안을 두고 줄다리기 협상을 벌이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 출구가 보인다는 취지의 발언이었다. 베선트 장관은 앞서 이날 CNBC 방송에서도 “한국과 (무역협상을) 마무리하려는 참”이라며 “악마는 디테일에 있지만 이를 해결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 등은 15일과 16일 연달아 미국을 찾았다.
한미 무역협상과 관련해서는 전문가들도 APEC 정상회의 때 트럼프 대통령 방한을 계기로 협상에 어느 정도 진척이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이날 워싱턴DC에서 열린 한미경제연구소(KEI) 세미나에서 커트 통 아시아그룹 파트너는 “트럼프 대통령의 방한이 임박하면서 양측이 무역협상에 집중하고 있다”며 “일정 부분 진전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한미 무역합의는 미일과 상당히 비슷할 것”이라며 “그 외의 어떤 합의안도 한국 대통령이 정치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에 합리적인 수준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대미 경제외교를 담당하는 안세령 주미대사관 경제공사도 “안보·투자·무역·기술 협력 분야에서도 한미 간에 진전이 이뤄지고 있다”며 “이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이 이달 말 만날 때 양측은 많은 내용을 발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소개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다만 협상 막바지 시점까지 공식 석상에서 한국이 요구하는 통화 스와프(화폐 맞교환), 대미 투자금 집행 방식에 대해 미국 측 입장만 강조하며 압박을 넣는 자세를 취했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백악관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관세 성과를 열거하면서 또 다시 “한국은 3500억 달러를 선불(upfront)로, 일본은 6500억 달러에 합의했고 두 나라 모두 서명했다”고 말했다. 이 발언은 상호관세의 불법 여부에 대한 연방대법원 재판을 앞두고 관세가 미국의 경제·안보에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는 상황에서 나왔다. 이를 두고는 한미 협상이 아직 마무리되지 않은 데다 일본의 대미 투자금 규모는 5500억 달러라는 점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사실을 착오한 게 아니냐는 해석도 제기됐다.
베선트 장관 역시 통화 스와프 문제를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책임으로 떠넘기며 발을 빼는 태도를 보였다. 베선트 장관은 기자간담회에서 “재무부는 통화 스와프를 제공하지는 않으며 그건 연준 소관”이라면서 “내가 만약 내가 연준 의장이라면 한국은 싱가포르처럼 이미 통화 스와프를 체결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베선트 장관은 나아가 미국 대법원이 상호관세가 무효라고 최종 판결하더라도 각국과 체결한 무역 합의는 유효할 것이라는 의견도 제시했다. 한국 등이 대법원 판단을 빌미로 무역 협상을 취소할 수 없게 하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베선트 장관은 “대법원이 상호관세를 무효화해도 행정부가 사용할 수 있는 다른 관세 부과 수단이 많다”며 “각국이 무역 합의를 철회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다음 달 5일 대법원의 상호관세 관련 첫 구두변론을 아예 직접 방청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이 계획이 현실화될 경우 이는 현직 대통령이 대법원 심리를 방청하는 사상 최초 사례가 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우리가 그 사건에서 이기지 못한다면 앞으로 여러 해에 걸쳐 약화되고 곤경에 시달리고 재정이 난장판이 될 것”이라며 “그런 이유 때문에 나는 대법원에 가서 보려고 한다”고 말했다.
앞서 한미 양국은 7월 30일 큰 틀의 관세 협상을 타결하고 3500억 달러 규모 대미 투자 등을 조건으로 한국에 대한 상호관세를 25%에서 15%로 낮추기로 합의했다. 두 나라는 그러다 8월 25일 한미정상회담 이후 대미 투자 이행 방안을 놓고 이견을 보이면서 최종 협정을 체결하지 못했다. 애초 한국은 직접 현금을 내놓는 지분 투자는 5% 정도로 설정하고 나머지는 직접 현금 이동이 없는 보증, 대출로 3500억 달러를 채우려고 구상했다. 하지만 미국은 미일 합의와 같은 사실상의 ‘투자 백지수표’를 한국에 요구했다. 이에 한국 정부는 무제한 한미 통화 스와프 체결, 합리적 수준의 직접 투자 비중, 투자처 선정 관여권 보장 등을 요구하고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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