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서 수사민원상담센터에서 근무하던 A 씨는 2023년 3월께부터 한 민원인을 대할 때마다 공포감을 느꼈다. 자신에게 다짜고짜 욕설을 내뱉거나 이해할 수 없는 얘기로 횡설수설할 때면 A 씨는 최대한 그를 달래려고 노력해야만 했다. 그로부터 1년 후 한동안 방문이 뜸했던 민원인이 다시 센터에 찾아왔다. A 씨가 그에게 고소장 작성을 도와준 뒤 해당 부서로 안내하는 찰나, 민원인은 갑자기 들고 있던 소주병을 꺼내 A 씨의 얼굴을 향해 휘두르고 허벅지를 가격하는 등 난동을 피웠다. 결국 그 민원인은 특수공무집행방해죄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A 씨처럼 폭행이나 기물 파손, 위험물 반입 등 민원인의 위법행위로 피해를 당한 공무원의 신고 건수가 5년 새 갑절 이상으로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에만 민원인 난동 사건이 3만 건 넘게 발생한 가운데 이직 고려는 물론이고 극단적 선택을 시도하는 공무원까지 증가하는 추세다. 일각에서는 민원인의 위법행위로부터 공무원을 지키고 재발을 방지할 수 있는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13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위성곤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따르면 지난해 정부 부처,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 등에서 일어난 민원인의 위법행위는 3만 4019건으로 집계됐다. 공휴일을 뺀 근무 일수(약 250일)를 감안하면 하루 평균 140건이 일어난 셈이다. 구체적인 사례를 보면 폭언이 2만 7730건에 달했으며 민원인에게 협박을 당한 사례도 2193건이나 있었다.
그럼에도 민원 처리 담당자의 대응은 소극적인 수준에 그치고 있다. 지난해 공무원이 민원인을 신고한 건수는 1185건으로 위법행위의 3.8%에 머물렀다. 그나마 전년보다는 증가하는 추세다. 민원인을 신고한 건수가 2020년(583건) 대비 2배 이상 늘었고, 한 해 동안 고소·고발건도 각각 50건, 48건으로 같은 기간보다 1.9배, 2.7배씩 증가한 것으로 집계됐다.
실제 현장에서는 극단적 사례가 빈번하다는 게 공무원들의 설명이다. 일례로 동주민센터를 찾은 한 민원인은 칼을 손에 쥔 채 안으로 들어섰다. 이어 대기 번호표를 20여 장이나 뽑더니 손에 쥔 칼의 등으로 민원대를 내리치며 고함을 질러댔다. 당시 현장에 있던 공무원들은 공포에 떨어야만 했고 결국 이 민원인은 위험물 소지와 주취 소란 등의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이러한 악성 민원인의 증가로 공직 사회는 더욱 얼어붙고 있다. 일부는 이직을, 어떤 이는 극단적 선택까지 할 만큼 사회적 문제로 확대되는 추세다. 한국행정연구원의 ‘2024년 공직 생활 실태 조사’를 보면 공무원의 이직 의향은 5점 만점에 3.31점으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직무 스트레스 유형 중 악성 민원 사무 대응은 3.48점으로 상위권을 기록했다. 업무 시간에 발생하는 악성 민원 사무 대응으로 업무 수행에 지장을 받는다는 공무원도 48.1%를 기록해 2명 중 1명은 악성 민원인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부 지자체는 폭언·폭행 등에 대비하기 위해 민원실이나 주민센터에 비상대응팀을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대다수는 전담 직원이 아닌 기존 공무원이 순번을 정해 업무를 맡는 방식이다 보니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게 공무원들의 생각이다.
이에 더욱 실질적인 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구체적으로는 산재, 심리치료, 안전장치 마련 등 피해 공무원을 적극적으로 보호하는 대책과 벌칙·과태료 등 악성 민원인 처벌 규정 마련, 고소·고발 관련 비용 지원 등이 거론된다. 실제 영국에서는 사례별로 ‘용인할 수 없는 민원인의 행동’ 여부를 정의하고 내부 지침을 마련해 무관용 원칙을 적용하는 등 악성 민원인 대응에 적극 나서고 있다. 국내에서도 전북 군산시가 6월부터 시청 전 부서와 행정복지센터의 행정 전화에 ‘폭언 방지 시스템’을 도입했고 경북 울진군은 11월부터 민원 담당 공무원 보호를 위한 ‘민원 전화 권장 시간’ 제도를 운영한다.
위성곤 의원은 “공무원이 폭언·폭행에 시달리며 이직이나 극단적 선택까지 내몰리는 현실은 심각한 사회문제”라며 “민원인의 위법행위가 계속 증가하는 만큼 피해 공무원을 보호하고 악성 민원 재발을 막을 수 있는 실효적 제도·대책을 마련해 건강한 민원 문화를 정착시켜 행정 서비스의 질을 높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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