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작품은 종말론적 공포의 한가운데에서도 예술의 힘을 새롭게 확인하게 하는 강렬하고 비전적인 세계를 보여준다”
9일(현지 시간) 스웨덴 한림원이 71살의 헝가리 현대 문학 거장을 2025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호명하면서 밝힌 선정 배경이다. 헝가리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받은 것은 2002년 임레 케르테스 이후 두 번째다.
앤더스 올슨 노벨 문학상 위원회 위원장은 “크러스너호르커이는 카프카에서 토마스 베른하르트에 이르는 중부 유럽 전통의 위대한 서사 작가로 부조리와 기괴한 과잉이 특징”이라며 “그러나 그의 작품에는 그보다 더 많은 요소가 있으며, 더욱 사색적이고 정교하게 조율된 어조를 채택해 동양을 바라보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끝없는 문장 속에서 문명의 불안을 예술의 언어로 승화시킨 작가”라고 덧붙였다.
크러스너호르커이는 1954년 공산주의 체제 하의 헝가리에서 태어났다. 부다페스트대에서 법학과 문학을 공부했다. 1987년 공산주의 체제의 헝가리를 처음 떠나 서베를린에서 1년 간 거주하는 등 전 세계를 여행하며 작품을 쓰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1985년 첫 장편 ‘사탄탱고’로 데뷔해 단숨에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이 작품은 헝가리 영화 감독 벨라 타르가 7시간 짜리 영화로 제작하기도 했다. 2015년에는 작가의 전 작품 세계를 기려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당시 심사위원장 마리나 워너는 “현실의 공포와 아름다움을 동시에 포착하는 놀라운 강도와 서정성을 지닌 비전의 작가”라고 평했다.
크러스너호르커이는 인간의 절망과 혼돈 속에서 미학을 탐구하는 작품으로 잘 알려져 있다. 미국 작가 수전 손택은 그를 “종말의 거장”이라 부르기도 했다. 특히 동유럽권 현대 문학 특유의 폐허와 절망감을 그리지만 그 안에서 인간이 끝내 포기하지 않는 예술적 신념을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대표작 ‘저항의 멜랑콜리’는 거대한 고래 모형을 끌고 나타난 서커스단으로 인해 혼란에 빠진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인간 사회의 붕괴와 광기를 그린 소설이다. 또 다른 작품 ‘헤르슈트 07769’는 독일의 한 낙서 청소부가 앙겔라 메르켈 총리에게 편지를 보내 세계의 파멸을 경고하는 내용으로 블랙 유머와 불안, 종말의 서사를 섬세하게 엮는다.
그의 문체는 길고 숨 가쁜 문장으로 유명하다. 한림원은 “수십 페이지에 걸친 단일 문장으로 세계의 혼돈을 서술하면서도, 그 안에서 인간 존재의 존엄과 예술의 의미를 되살린다”고 평가했다. ‘저항의 멜랑콜리’는 헝가리어 초판(1989) 기준 300쪽이 넘는 분량이 단 한 문장으로 이어져 있다. ‘사탄탱고’ 역시 총 12개의 장이 각각 한 개의 문단으로 이뤄져 있다.
크러스너호르커이의 문학은 세계가 끝나가고 있다는 예감 속에서도 인간이 언어를 통해 어떻게 생존할 수 있는가를 묻는 여정이었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 체제 붕괴와 인간의 불안, 신의 부재, 문명에 대한 불신을 다룬다. 그럼에도 그의 소설은 절망의 서사 속에서도 인간이 세상을 견디게 하는 힘을 잊지 않는다. 2015년 영국 일간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먼저 글자들, 그 다음은 단어들, 그 단어들로 짧은 문장 몇 개, 그리고 더 긴 문장들, 결국은 아주 긴 문장들을 쓴다. 35년 동안 이어진 그 과정 속에서 나는 언어의 아름다움, 그리고 지옥 속의 유희를 발견했다”고 말했다.
이번 노벨 문학상은 비아시아·비영어권의 남성 작가가 받을 것이라는 전망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지난해 한강 작가가 한국인 최초이자 아시아 여성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다. 다양한 문화권에서 다양한 언어로 쓰여지는 문학을 골고루 조명하려는 스웨덴 한림원의 최근 행보의 일환으로 풀이된다.
AFP 통신에 따르면 크러스너호르커이는 이날 스웨덴 라디오 방송을 통해 “노벨상 수상자로서의 첫 번째 날”이라며 “매우 기쁘고 평온하면서도 긴장된다”고 소감을 전했다. 앞서 마츠 말름 스웨덴 한림원 상무이사는 “프랑크푸르트를 방문 중이던 크러스너호르커이에게 전화로 수상 소식을 전했다”고 언급했다.
크러스너호르커이의 소설은 국내에서 알마 출판사를 통해 출간돼 왔다. ‘저항의 멜랑콜리’ ‘벵크하임 남작의 귀향’ ‘라스트 울프’ ‘세계는 계속된다’ 등 총 6권이 나와 있으며 ‘헤르슈트 07769’는 내년 초 출간을 목표로 번역 작업 중이다. 안지미 알파 출판사 대표는 “묵시록 문학의 대가다. 다만 무겁고 암울한 문장 속에서도 유머와 희망이 곳곳에 숨어 있다”며 “그의 작품은 난해하지만 예술만이 주는 순수한 아름다움과 기쁨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출판계에서는 이번 노벨상 수상을 계기로 동유럽 문학에 대한 관심이 커질 것이라는 기대도 나온다. 한 대형 출판사 관계자는 “노벨상 효과가 보통 이듬해 상반기까지 이어진다”며 “헝가리를 비롯해 다른 동유럽 작품들도 독자들의 관심을 받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시상식은 12월 10일 스웨덴 스톡홀름 왕궁에서 열린다. 수상자는 메달과 상장, 그리고 상금 1100만 스웨덴 크로나(약 15억 원)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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