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의 핵심 의제 중 하나가 ‘자유롭고 공정한 무역질서’다. 지난해 페루에서 열린 회의에서도 APEC 회원들은 이른바 ‘마추픽추 선언’을 통해 다자무역 질서에 대한 지지를 재확인한 바 있다.
문제는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달라진 국제 질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강력한 ‘보호무역’ 기조 속에서도 회원국들이 ‘천년고도 경주’에서 새로운 글로벌 가이던스를 제시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올해 APEC 정상회의 주간은 27일부터 11월 1일까지 일주일로 지정됐다. 이 기간 동안 최종고위관리회의와 외교통상 합동 각료회의, 기업 최고경영자 회의(CEO 서밋) 등의 일정이 진행된다. 하이라이트는 마지막 이틀간(10월 31일~11월 1일) 경주 화백컨벤션센터(HICO)에서 열리는 ‘정상회의’다. 이 자리에서 발표될 ‘경주 선언’을 위해 회원들은 지난해 12월부터 고위관리회의와 재무·통상·디지털경제 등 각 분야별 장관회의를 이어오며 의견을 조율해왔다. ‘경주 선언’은 지난 1년간의 대장정을 집약한 종합판인 셈이다.
외교부 당국자는 “올해 사상 최대 규모인 14개의 분야별 장관회의와 고위급 회의가 고용·교육·여성·경제·디지털·인공지능(AI)·에너지·문화 등 분야에서 개최되고 있다”며 “각 회의에서 21개 회원 간 컨센서스에 의거한 합의 문서가 도출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20년 만에 의장국이 된 우리 정부의 주도 하에 각 주제별로 논의가 진행되고 있지만 이번 APEC을 둘러싼 환경은 그 어느 때보다 녹록지 않다. APEC의 본령이자 세계 무역질서를 떠받쳤던 자유무역주의가 어느 때보다도 위기에 처해 있는 탓이다. 세계 경제의 중심축인 아시아태평양 주요국들은 보호무역주의 확산과 자국중심주의 파고 속에서도 최소한의 공통분모를 찾아야 하는 중요한 과제를 떠안게 된 것이다.
관건은 APEC의 전통적 지향점인 다자간 무역체제에 대한 지지와 아태지역 무역자유화를 이번 정상회의에서도 이어갈 수 있을지 여부다. 최근 보호무역주의 흐름 속에서도 지난해 페루와 2023년 미국에서 열린 APEC 정상회의에서는 세계무역기구(WTO) 중심의 다자간 무역체제에 대한 지지를 재확인한다는 내용을 공동선언에 담아냈다.
하지만 이번 APEC은 트럼프 대통령의 재선 이후 처음 치러지는 정상회의다. 지난 1년간 트럼프 대통령은 고율 관세를 앞세워 글로벌 무역 질서를 뒤흔들어왔다. 이번에도 다자주의 지지 등의 문구에 제동을 걸며 ‘비호혜적’ 무역 환경을 시정해야 한다는 등의 주장을 할 공산이 크다. 이에 맞서 중국은 다자간 무역체제 수호를 앞세우며 미국에 날을 세울 가능성이 높다.
APEC은 컨센서스(만장일치) 방식으로 의사 결정이 이뤄지기 때문에 21개 회원 중 한 나라라도 반대하는 문구는 공동선언에 들어갈 수 없다. 5월 제주에서 열린 통상장관회의에서도 ‘WTO의 중요성을 인식한다’는 내용의 공동성명을 채택하기까지 상당한 진통을 겪어야 했다. 정상선언 문안 도출까지 난항이 예상되는 만큼 의장국인 우리 정부의 어깨 또한 무거울 수밖에 없다. 최소한의 공감대 마련에 실패할 경우에는 의장성명만 나올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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