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관세 압박을 희토류 카드로 맞대응 했던 중국이 이제는 대두(콩) 수입 제한으로 미국을 향한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달 31일 경주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참석을 계기로 한국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만나 대두 관련 문제를 논의하겠다고 예고한 상태다. 미국과 중국의 무역·관세 협상이 장기 휴전에 빠지는 동안 ‘대두 전쟁’이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는 모양새다. 이를 두고 중국의 대두 수입 제한이 풀리지 않을 경우 트럼프 대통령이 내년 중간선거에서 큰 타격에 빠질 것이라는 전망이 커지고 있다.
8일 로이터통신과 중국 제일재경 등에 따르면 트럼프 미국 행정부는 관세 문제와 미중 무역분쟁, 풍작 등의 영향으로 타격을 입은 미 농가를 지원하기 위한 대책을 이번 주 내에 발표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초기 지원 규모는 최대 150억 달러(약 21조 원) 가량이라는 관측이다.
핵심은 미국의 대두 수출이 심각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미 공화당은 연말까지 농가 지원이 없다면 이들이 재정적으로 파국을 맞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중국은 미국산 대두의 최대 고객이었으나 미국과 무역 갈등을 빚으면서 수입처를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 남미로 전환했다.
이미 트럼프 행정부 1기에도 벌어졌던 상황이 재현되고 있다. 당시 중국은 미국산 대두 수입을 줄여 미국 대두 농가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일리노이 대두협회의 시장 개발 담당자인 이사인 토드 메인은 “지난번에 브라질에 시장 점유율 약 20%를 빼앗겼는데, 아직 그 점유율을 회복하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 에너지 비용과 관세 등의 요인으로 비료, 살충제, 농기구, 기계류 가격이 상승하면서 대두 농가의 비용은 더욱 증가했다. 미네소타 대두 재배자 협회의 카일 조어 사무총장은 “매출 수준은 2018년과 비슷하지만 투입 비용이 크게 증가했고 이익률도 크게 악화됐다”라고 지적했다.
미국 퍼듀대의 최신 추정에 따르면, 2025년 중급 토양에서 재배되는 미국산 대두의 손익분기점은 부셸당 12.35달러이며, 내년에는 부셸당 12.50달러로 상승할 것으로 예상된다. 반면 지난 6일 시카고상품거래소(CME)의 11월물 대두 가격은 부셸당 10.18달러로 마감됐고, 내년 1월물 대두 가격은 부셸당 10.36달러로 장을 마쳤다. 이는 손익분기점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으로, 대두 농가들은 상당한 재정적 압박을 받고 있다.
미국대두협회(ASA) 회장 중 한 명인 조쉬 개클은 9월 말 “노스다코타의 대부분의 대두 농가들은 대두 1에이커당 약 100달러에서 150달러의 손실을 보고 있다”며 올해 자신의 농장이 40만 달러 이상의 손실을 볼 것으로 예상했다.
일부 대두는 가공 공장으로 보내져 대두유나 에탄올로 만들어질 수 있지만, 많은 농장들이 작물을 처리하고 활용할 수 있는 가공 공장 근처에 없는 상황이다. 옥수수 수확기 운송 주문이 꽉 찬 상태여서 중국과의 무역이 재개된다 하더라도 대두를 그냥 두고 기다려야 할 수도 있는 실정으로 알려졌다.
많은 미국 대두 농가들은 막대한 손실을 피하기 위해 수확한 대두를 보관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캐빈 해셋 백악관 수석 경제고문은 “사일로가 가득 차서 대두가 방수포로 덮여 땅바닥에 쌓여 있다”며 “이는 대통령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 시인했다. 그는 또한 행정부가 무역 협상의 일환으로 “전 세계 모든 대두 소비자들에게 연락을 취하고 있다”고 밝혔다.
미국 농무부에 따르면, 중국 외에 미국 대두의 주요 수입국인 유럽연합(EU)과 멕시코는 지난해 각각 20억 달러를 약간 넘는 금액을 구매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이는 중국 대두 수입량의 약 20%에 불과하다. 올해 방글라데시, 베트남, 이집트, 태국, 말레이시아와 같은 국가로의 미국산 대두 수출이 증가했지만 이들 대체 시장의 공급 능력은 여전히 미국 대두 수출 수요를 충족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트럼프 행정부가 아르헨티나에 200억 달러 규모의 통화 스와프를 제공할 계획이라는 소식은 미국 대두 농가들의 분노를 더욱 증폭시켰다. 아르헨티나가 이전에 대두 및 기타 곡물에 대한 수출 원천징수세를 일시적으로 폐지한다고 발표하자 해외 바이어들이 아르헨티나산 대두와 대두유 구매에 뛰어들면서 미국산 대두에 대한 판매 압력이 더욱 커졌다. 케일럽 래글랜드 미국대두협회(AAA) 공동회장은 “미국 대두 가격이 하락하고 수확이 시작되면서 농가들이 접하는 뉴스는 중국과의 무역 협상이 아니라 미국 정부가 아르헨티나에 200억 달러 규모의 경제 지원을 제공한다는 것”이라며 “이는 참을 수 없는 좌절감을 줬다”고 지적했다.
미 대두 농가의 불안감이 확산되자 트럼프 행정부도 불안감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대두 생산은 미국 중서부 지역에 집중돼 있다. 이들 지역은 내년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의 중요한 유권자 기반이 되는 일리노이, 아이오와, 미네소타, 인디애나, 오하이오 등에 속한다.
위기감이 커지고 있는 미국 대두 농가에 대한 대응으로,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관세 수입의 일부를 농가 보조금으로 사용하겠다고 밝힌 상태다. 스콧 베센트 미 재무장관은 정부가 농가 신용평가기관과 협력해 농가들이 다음 파종기를 위한 충분한 자금을 확보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더 나아가 트럼프 행정부는 국내 대두 수요를 확대하기 위해 바이오연료 혼합 할당량을 늘리는 방안을 제안하기도 했다.
앞서 트럼프 행정부 1기에도 중국과의 관세 분쟁으로 중국이 미국산 대두 수입을 줄이자 손실을 상쇄하기 위한 농가 지원 프로그램을 가동한 적이 있다. 미 의회조사국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2018년과 2019년에 농가에 280억 달러의 지원금을 제공했다.
이번에도 미 행정부가 농가 지원에 나설 경우 단기적으로 손실을 메울 수는 있지만, 미국 대두의 시장 점유율이 줄어든 부분을 원천적으로 해결하기는 힘들다는 게 경제학자들과 업계 관계자들의 전망이다.
미국대두협회의 스콧 겔트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연방 정부의 구제금융이 단기적으로는 도움이 되지만 “전 세계 다른 지역에서의 확장으로 인한 시장 점유율의 영구적인 손실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바이오연료의 혼합 할당량 인상도 (대두) 수출 수요를 상쇄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고 비판했다.
시간도 넉넉하지 않은 상황이다. 중국은 이미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같은 나라에 12월 이전에 인도될 대두를 주문했으며, 대두 협상이 곧 타결되지 않으면 중국은 미국을 완전히 포기할 수도 있다는 관측까지 나온다. 한국에서 마주하게 될 트럼프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의 협상 테이블에 올라올 대두 문제의 주도권을 중국이 쥐고 있는 만큼 미국이 어떤 대응에 나설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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