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무역 합의를 맺는 과정에서 미국의 대만 독립 반대를 명시하는 방안을 추진한다는 주요 외신 보도가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최근 트럼프 행정부에 자국 동영상 플랫폼 틱톡의 미국 사업권을 넘기고 세계무역기구(WTO) 개발도상국 지위를 포기하는 등 중국이 미중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예상 밖의 큰 양보를 잇따라 내놓으면서 그 개연성에 힘을 싣는 분위기다. 트럼프 대통령의 결단에 따라 2027년 중국의 침공설에 시달리는 대만의 운명도 크게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세계 최대 반도체 위탁 생산(파운드리) 기업인 TSMC를 비롯해 폭스콘, 에이수스 등 전통 자유주의 진영 최첨단 기술 공급망의 한 축을 이루던 대만 기업들의 가치도 흔들릴 수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다만 미중 무역 협상에서 미국이 얻는 경제적 이득은 일시적이나 양안(兩岸) 문제로 잃는 실익은 자칫 영구적일 수도 있다는 점에서 ‘거래통’을 자부하는 트럼프 대통령이 쉽게 중국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도 만만찮게 나온다. 미국과 중국이 양안을 둘러싼 안보 문제로 10월 말 경북 경주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직전까지 팽팽한 기싸움을 펼치는 가운데 대만이 이를 빌미로 무역 압박 유탄을 맞을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WSJ “시진핑, 트럼프에 ‘대만 독립 반대’ 압박”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지난 27일(현지 시간) 시 주석이 트럼프 대통령과의 무역 협상에서 대만에 대한 미국의 정책 변화를 끌어내 대만을 고립시키려고 한다고 보도했다. WSJ에 따르면 중국은 트럼프 대통령이 무역 합의를 간절히 바란다고 믿고 있다. 이에 시 주석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미국이 대만의 독립을 반대한다’고 공식 선언하도록 압력을 가할 계획이다.
미국은 1979년 1월 지미 카터 당시 대통령과 덩샤오핑 전 주석 시절 미중 수교를 위해 중국을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하고 대만과 외교 관계를 단절했다. 그러면서도 중국과 대만 모두 어느 한쪽이 현 상황을 일방적으로 바꾸는 것에 반대하는 식으로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했다. 대만의 독립과 관련한 입장을 명확히 밝히지 않으면서 뒤로는 우방이나 준동맹에 가까운 국가처럼 대우했다. 조 바이든 전 대통령의 경우 “중국이 대만을 침공하면 미국이 방어하겠다”고 했다가 양안 정책이 달라진 게 아니냐는 논란에 일자 ‘하나의 중국’ 정책을 재확인하고 “대만 독립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WSJ는 시 주석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대만 독립을 지지하지 않는다’를 넘어 ‘대만의 독립을 반대한다’는 입장을 요구할 것이라고 전했다. WSJ에 따르면 시 주석에게 이는 단순한 표현의 차이가 아니다. 미국이 대만의 독립을 지지하지 않는 수준이라면 다른 이유를 들어 중국을 견제할 수 있지만 반대하는 입장이 되면 중국에 동조해 적극적으로 대만을 압박할 수 있다. 이는 최근 ‘실각설’까지 제기된 시 주석의 정치적 위상을 강화하는 효과도 낼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아직 바이든 행정부의 이 입장을 공식적으로 계승하지는 않고 있다. 이를 서둘러 공표할 경우 중국에 대한 협상력이 약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앞서 미국 국무부는 지난 2월 ‘대만과의 관계에 관한 팩트시트(자료집)’에서 ‘대만 독립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문구를 삭제했다. 중국의 침공을 억제하고 대만이 드론·탄약 구매를 확대해 방어력을 기를 수 있는 데에는 지원을 멈추지 않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1기 집권 때도 치열하게 미중 경쟁을 펼치며 대만과 관계를 확대하고 무기 판매를 늘린 바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그러면서도 최근 대만에 대한 군사 지원을 미루고 중남미를 방문하려던 라이칭더 대만 총통의 미국 경유를 막으면서 중국와의 협상 여지를 남겼다. 중국 외교부는 트럼프 대통령 취임 직후인 올 1월 25일에도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부 장관이 왕이 중국 중앙 외사판공실 주임 겸 외무부장과 통화한 사실을 알리면서 “미국은 대만 독립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발언을 했다고 주장했다.
日언론도 “대만 문제가 트럼프 방중 조건”…中, 틱톡·개도국 포기 잇딴 양보
중국이 대만에 대한 입장을 최우선 과제로 내밀면서 트럼프 대통령의 내년 초 방중에 공을 들인다고 최근 보도한 외신은 WSJ뿐이 아니다. 일본 요미우리신문도 지난 21일 “트럼프 대통령의 방중 실현에는 장애물이 있다”며 19일 미중 정상 통화에서 대만 문제가 언급되지 않은 점을 꼬집었다. 미중 양국은 트럼프 대통령과 시 주석이 당시 90분 동안 통화한 사실을 알리면서도 주로 무역 협상과 관련한 대화 내용만 소개했다.
요미우리신문은 “미국과 중국의 교섭이 당분간 격화될 듯하다”며 중국이 트럼프 대통령의 중국 방문 조건으로 ‘대만 독립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발표를 원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신문은 “중국과 거래를 추구하는 트럼프 대통령은 군사 지원 승인을 미루는 등 대만에 대한 관여를 줄이려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며 “이를 호기로 보는 중국이 더 양보를 끌어내려 할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중국이 ‘대만의 독립을 반대한다’는 선언을 요구한다는 WSJ의 기사는 이보다 한 발 더 나아간 보도였다.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도 트럼프 대통령의 연내 방중이 실현되지 않은 것은 양국 무역 협상이 난항을 겪고 있다는 점이 반영된 것이라고 평가했다. 닛케이는 “중국은 진작부터 트럼프 대통령의 방문을 추진했다”며 “미중 관계를 안정화하고 대만 해협과 남중국해에서 우발적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는 미중정상회담이 좋은 대책이라고 봤다”고 보도했다.
실제로 최근 중국이 트럼프 대통령의 방중과 대만 독립 반대 입장 발표에 손짓을 보내는 신호는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시 주석과 통화하기 전인 지난 15일 틱톡의 미국 사업권을 자국 기업들이 인수할 수 있게 됐다고 미리 알렸다. 중국이 틱톡과 관련해 한 발 양보했다는 뜻이다. 미국은 이와 함께 오는 11월 10일까지로 된 이른바 ‘관세 휴전’의 기한을 더 연장할 뜻도 시사했다.
리창 중국 국무원 총리도 23일 UN 세계개발구상(GDI) 고위급 회의 연설에서 “중국은 책임지는 개도국으로서 WTO의 현재와 향후 협상에서 새로운 특별 차별 대우를 추구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2001년 WTO에 가입한 이래 협정 이행 유예, 기술 지원 등 개도국 지위로 받은 150여 개의 혜택을 포기하겠다는 의미였다. 이는 미중 무역 협상 과정에서 미국이 중국에 줄곧 요구한 사안이었다.
2027년 침공설 ‘솔솔’…대만 외교부장, UN총회 때 장외 여론전
양안 관계를 둘러싼 미중 양국의 힘겨루기에 가장 불안해 하는 곳은 당연히 대만이다. 대만은 시 주석이 3연임 마지막 해인 2027년, 4연임을 위한 성과를 거두기 위해 자국을 침공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시 주석은 대만을 군사적으로 장악할 준비를 2027년까지 마치라고 인민해방군에 지시한 바 있다. 이런 상황에서 트럼프 대통령까지 지원을 거두거나 방관할 경우 순식간에 홍콩과 같은 처지에 빠질 수도 있다. 영국의 안보 싱크탱크 로열 유나이티드 서비시즈 인스티튜트(RUSI)는 26일 홈페이지에서 러시아도 대만 침공 준비와 관련해 공수부대 공격 전술과 하이브리드전(戰)에 대비한 기술·훈련·장비를 중국 인민해방군에 지원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25일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상황이 불안하게 돌아가자 린자룽 대만 외교부장(장관)은 UN총회를 계기로 미국 뉴욕을 방문해 외교 동맹국들을 상대로 여론전을 펼쳤다. 대만 외교부장이 UN총회 기간 뉴욕을 방문한 사실이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소식통에 따르면 린 부장은 지난 22일 미국글로벌전략(AGS)이 주최한 행사에도 참석했다. AGS는 트럼프 대통령의 측근인 로버트 오브라이언 전 국가안보보좌관과 알렉산더 그레이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비서실장이 설립한 컨설팅회사다.
대만은 1945년 UN 창립 멤버였다가 1971년부터 중국이 그 자리를 꿰찬 탓에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상임이사국 등의 지위를 잃었다. 지금은 UN 회원국도 아니라서 총회에는 참석하지도 못한다. 대만은 그간 중화민국이라는 이름으로 UN 재가입을 꾸준히 시도했으나 ‘하나의 중국’ 원칙을 주장하는 중국의 반대로 번번이 실패했다.
궈자쿤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23일에도 정례브리핑에서 “미일한(한미일) 3국이 대만·해양 문제에 관해 제멋대로 얘기한 것은 중국 내정에 간섭하고 중국을 비방·먹칠한 것”이라며 “중국은 이에 강한 불만을 표하고 단호히 반대한다”고 반발했다. 22일 조현 외교부 장관과 루비오 장관, 이와야 다케시 일본 외무장관이 UN총회 고위급 회기를 계기로 “남중국해에서 불법적인 해양 주장과 이를 강화하는 시도에 강력히 반대한다. 대만 해협에서의 평화와 안정 유지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내용의 공동 성명을 발표하자 이를 공격한 것이다. 중국은 남중국해에 ‘U자’ 형태의 ‘구단선’으로 불리는 영해선을 설정해 해역의 90%가 자국 영해라고 주장하고 있다. 지난 8월에는 이 해역에서 중국 해경선이 영유권을 다투는 필리핀의 해경선을 쫓다가 자국 군함과 충돌하는 사고가 벌어지기도 했다.
美국방전략 “대만 침공 때 미군 개입” 변경…중국은 APEC 신라호텔 예약 취소
외교가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원하는 것을 최대한 얻기까지 대만 문제를 쉽게 양보하지는 않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24일 일본 산케이신문에 따르면 미국 정부가 곧 발표할 새 국방전략(NDS)에도 대만 방위 노력을 강화한다는 방침이 담길 예정이다. 이 신문에 따르면 NDS는 ‘미국 본토 방위’와 ‘중국의 대만 제압 억지’를 가장 중요한 과제로 꼽으면서 중국이 대만을 침공해 상륙 작전을 개시할 경우 미군이 개입해 이를 저지한다는 구체적 시나리오도 담는다.
주요 외신들은 당초 10월 말 경주 APEC 정상회의에 트럼프 대통령과 시 주석이 동반 참석해 양자 정상회담까지 가질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이와 관련해서는 시 주석의 서울 숙소로 유력하게 점쳐진 신라호텔이 11월 초 예식 예약자들에게 “국가 행사가 예정돼 있어 부득이하게 예약 변경을 안내한다”며 결혼식 취소 사실을 통보해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호텔신라(008770) 측에 따르면 이 호텔은 그 이후 지난 주말 갑자기 일정을 번복하며 “원래 일정대로 결혼식 진행이 가능하다”는 안내 연락을 돌렸다. 이 호텔은 최근 APEC 기간 예약됐던 국가 행사 예약에 대한 취소 요청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만약 그 주체가 시 주석이 맞다면 중국 지도자가 APEC 정상회의에 오지 않거나, 적어도 서울에는 묵지 않을 수도 있는 셈이다. 대만과 무역 합의 내용을 두고 막판까지 미중 양측이 팽팽한 기싸움을 펼치고 있음을 추정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일각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양안 문제를 앞세워 대만에 무역 압박 공세를 강화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방위비와 미군 주둔을 무기로 한국과 일본에 무역 압박을 넣는 것과 유사하게 중국이 양안 문제에 민감해 할 수록 이를 대만에 대한 이익 취득 수단으로 쓸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이다.
대만은 현재 미국과 큰 틀에서의 무역 합의도 맺지 못한 상태다. 그런데도 트럼프 대통령은 7월 31일 대만에 대한 관세율을 기존 32%에서 한국(25%)보다 낮은 20%(임시)로 내려줬다. 당시 대만은 미국에 3000억~40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안을 제안했다. 대만 언론은 자국 정부가 이달 17일 워싱턴DC 미국 연방의회 의사당에서 4년간 100억 달러(약 14조 원)가 넘는 규모의 미국 농산물 구매 의향서를 체결했다고 보도했다. 웨이저자 회장은 TSMC 3월 초 미국 백악관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만난 뒤 애리조나주에 5곳의 최첨단 반도체 시설을 짓는 1000억 달러(약 146조 원) 규모의 대미 투자를 결정하기도 했다.
※'트럼프 스톡커(Stocker)'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시대에 투자에 도움이 될 만한 미국의 시장·기업·정책·정치·외교 관련 현장 이야기와 현안 분석을 전달하는 코너입니다. 구독하시면 유익한 미국 소식을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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