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전문직 취업비자(H-1B) 발급 수수료를 현행 1000달러에서 10만 달러(약 1억 4000만 원)로 무려 100배나 올리는 포고문에 19일 서명했다. 조지아 구금 사태로 한미 비자 협상을 진행 중인 우리로서는 예기치 못한 충격적인 변수다. H-1B 비자는 과학·기술·공학·수학(STEM) 분야 전문직을 위한 제도로 추첨을 통한 발급 건수가 연간 8만 5000건으로 제한돼 있다. 미국이 첨단기술 초격차를 확보하며 빅테크 기업을 탄생시킨 배경이기도 하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의 강성 지지층인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세력은 이 비자가 미국인의 일자리를 빼앗는다고 주장해왔다. 이번 조치는 무역 협상으로 얻은 투자를 미국인 고용 확대와 연계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해석된다.
‘비자 폭탄’에 전 세계가 충격을 받고 있다. 미국 내 빅테크 기업들 역시 혼란에 빠졌다. 혁신의 통로를 스스로 차단해 중국을 이롭게 하는 조치라는 비판이 잇따른다. 강성 지지층에 굴복한 이민정책이 미국을 후퇴시킬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백악관이 신규 신청에만 해당한다며 진화에 나섰지만 이번 조치는 한미 비자 협상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칠 것이다.
당장 한국 전문 인력 전용 비자 신설과 기존 H-1B 비자 쿼터 확대 방안을 모색했던 우리 정부 전략의 수정이 불가피해 보인다. 반이민정책 강화로 미국 측이 더 까다로운 조건을 내세울 가능성도 있다. 불확실성이 커진 만큼 더욱 정교한 전략이 요구된다. 호주 ‘E-3’ 전문직 비자에 한국을 추가하는 방안 등 다양한 카드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우리 기업의 미국 내 투자가 현지 고용을 창출한다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
정부는 미국 정부의 반이민정책으로 인한 기업 피해를 최소화하는 동시에 고급 기술 인재 유입 전략을 병행해야 한다. 이번 조치로 핵심 인재의 미국 유출이 줄어들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는 위험하다. 오히려 더 적극적인 인재 유입 정책이 절실하다. 대한상공회의소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의 인공지능(AI) 인재는 인구 1만 명당 0.36명이 해외로 빠져나갔다. 중국은 ‘천인계획’에 이은 ‘치밍(啓明)계획’을 통해 AI·반도체 등 전략기술 인재 귀환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우리도 STEM 인재 지원을 대폭 강화해 ‘브레인 투 코리아’에 속도를 높여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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