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오 드라기 전 유럽중앙은행(ECB) 총재가 “미국과 중국에 경쟁력이 크게 뒤진 유럽이 상황 파악도 제대로 못하고 있다”고 쓴소리를 날렸다. 그는 2011년부터 2019년까지 ECB를 이끌며 과감한 통화 완화 정책으로 유럽이 재정위기를 벗어나는 데 크게 기여해 ‘슈퍼 마리오’로 불리는 인물이다. 그 이력을 발판 삼아 고국 이탈리아 정계에 입문, 2021년 2월부터 1년 8개월 동안 총리를 역임하기도 했다.
“속도·규모·강도 모두 뒤져”
드라기 전 총재는 16일(현지 시간) 벨기에 브뤼셀에서 ‘드라기 보고서’ 발간 1주년을 기념해 열린 콘퍼런스에서 이 같이 말했다. 드라기 보고서는 그가 구상한 유럽연합(EU)의 경쟁력 강화 방안을 집대성해 총 328쪽 분량으로 발간한 보고서로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이 직접 그에게 작성을 부탁했다. 드라기 전 총재는 보고서에서 EU의 경쟁력이 실존적 위기를 맞았다고 진단하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해마다 연간 최대 8000억 유로(약 1308조 7680억 원)을 투자해 산업 구조를 뿌리부터 개혁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러나 EU의 현실은 1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 그의 지적이다. 드라기 전 총재는 “EU는 글로벌 질서의 변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면서 “(경쟁국에 밀리지 않으려면) 차원이 다른 속도와 규모, 강도가 요구된다”고 촉구했다. 또 “미국과 중국의 경쟁자들은 법의 테두리 안에서 활동해도 (유럽에 비해) 훨씬 제약이 덜하다”며 “각자의 노력을 분산시킬 것이 아니라 (유럽이) 함께 행동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드라기 전 총재 또 EU의 보조금 제도가 역내 기업들을 우물 안 개구리로 만들고 있다고도 꼬집었다. “EU 각국이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산업을 여전히 구축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끝나지 않은 재정 위기… 프랑스를 보라
드라기 전 총재의 지적대로 EU는 산업 경쟁력 강화는 둘째치고 고질병인 재정 불안 문제도 제대로 해소하지 못하고 있다. 유로존(유로화 사용 20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정부 부채 비율은 올해 1분기 현재 평균 88%로 재정위기가 한창 때인 2010년(당시 16개국) 85.4%보다 오히려 높아졌다. 남유럽 국가 포르투갈(96.4%)과 이탈리아(137.9%), 그리스(152.5%), 스페인(103.5%)은 여전히 부채 비율이 높은 상황이다. 재정위기 당시 PIGS(포르투갈·이탈리아·그리스·스페인)라는 오명으로 불리며 위기의 진앙지라고 불렸던 곳들이지만 상황이 개선되지 않은 것이다. EU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압박으로 전격적인 국방비 확대를 결정할 때도 가장 큰 걸림돌로 작용했던 게 바로 국가 부채 트라우마다.
최근에는 프랑스가 ‘문제아’로 떠올랐다. 최근 파이낸셜타임스(FT)는 2017년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 법인세 등 감세 정책으로 재정 여력이 감소했지만 코로나 19 팬데믹,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등을 겪으면서 공공 지출은 증가한 것이 프랑스의 국가 부채 문제를 더욱 심화했다고 짚었다. 마크롱 대통령은 ‘이제는 프랑스가 일을 해야 할 때’라며 정년을 62세에서 64세로 늘리는 내용을 핵심으로 한 연금 개혁을 추진해 2023년 관철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정부의 긴축 기조를 바라보는 민심은 차갑게 식었다. 이달 3일 여론조사 업체 베리안과 르피가로매거진의 공동 여론 조사에서 마크롱 대통령을 신뢰한다는 응답률은 15%로 역대 최저치로 떨어졌다. 2018년 말 정부의 유류세 인상 방침에 반발해 전국적으로 ‘노란 조끼’ 시위가 벌어졌을 때보다 더 낮은 수준이다. 프랑스 주요 노조는 18일을 ‘공동 행동의 날’로 정하고 정부의 긴축 재정에 항의하는 대규모 파업과 시위를 열기로 했다. 시위 참여자 수는 앞서 이달 10일 열렸던 이른바 ‘국가 마비’ 운동(20만 명) 때의 2배인 40만 명에 이를 것으로 현지 당국은 예상하고 있다. 프랑수와 베이루 전 총리가 긴축 재정안을 추진하다 의회에서 불신임표를 받고 물러났음에도 정부를 상대로 실력 행사를 하겠다는 것이다.
이같이 좀처럼 해소되지 않는 EU 국가 부채 문제의 대안으로 ‘공동 채권'이 떠오르기도 했다. 유로존 국가들이 연대 보증으로 발행하는 채권인 유로본드다. 드라기 전 총재도 유로본드 발행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공동 채권이 마법처럼 재정적 여유를 확대하지는 않을 것”이라면서도 “다만 국가별 접근으로는 (대규모 투자금 조달이)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분명 도움이 되는 접근법"이라고 역설했다. 그러나 다른 국가의 빚을 떠안는 형국이라는 점에서 EU 내에서 폭넓은 동의를 얻지는 못한 채 논의는 공전하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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