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떠한 이면 합의도 하지 않고 국익에 반하는 결정은 절대 하지 않겠다. 합리성과 공정성에서 벗어난 어떠한 협상도 하지 않겠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11일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밝힌 한미 관세 협상을 골자로 한 외교·안보 패키지 딜과 관련한 언급은 현재 한국과 미국이 통상·외교·관세·안보라는 복잡한 영역에서 중심을 잡고 협상을 이어가고 있다는 의지와 각오로 읽힙니다. 동시에 협상의 위태로운 상황을 절실히 전달한 것이기도 합니다.
현실은 명확합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한국인 근로자 300여 명을 석방하자마자 한국의 ‘뒤통수’를 또 쳤습니다. 지난 7월 타결된 한미 관세 협상과 관련해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은 CNBC 인터뷰에서 “이 대통령이 문서에 서명하지 않았다”며 “그래서 백악관에서도 무역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이어 “한국은 관세 협상을 수용하거나 관세를 내야 한다”고 압박했습니다. 구금된 이들 중 임산부까지 포함돼 국내 여론이 격앙된 상황에서, 무역협정에 서명하거나 25% 관세율을 감수하라는 고강도 압박이 시작된 것입니다.
뒤통수 치는 미국…곤혹스러운 정부·기업
우리 정부 입장은 곤혹스럽습니다. 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25% 관세율은 우리 기업의 가격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부담을 키워 대미 수출에 불가피한 타격을 주게 됩니다. 국가경제에 미칠 악영향은 가늠조차 어렵습니다. 한미정상회담을 가까스로(?) 통과했지만, 양국 정상이 만나기 직전 트럼프 대통령은 SNS를 통해 ‘숙청’ ‘혁명’ ‘교회 압수수색’ ‘미군기지 정보수집’ 같은 자극적 표현으로 한국을 압박했습니다. 이번에도 구금된 인력이 귀국하는 날에 맞춰 “빨리 도장을 찍고 현금을 내라”는 식의 태도를 보인 것은 동맹국에 대한 예의가 사라진 지 오래라는 점을 다시금 드러낸 것입니다.
한미 관세 협상은 한국이 3500억 달러(약 488조 원)를 미국에 투자하는 조건으로 상호 관세율을 25%에서 15%로 낮추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다만 최종 서명이 미뤄진 것은 투자 패키지 구성, 투자 방식, 이익 배분을 둘러싼 이견 때문입니다. 이 대통령이 “이면 합의는 없고 국익에 반하는 결정은 절대 없다”고 강조한 것은 이러한 불평등한 조건을 그대로 수용할 수 없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美, 문서화 확정 일본 앞세워 고강도 압박
미국은 이미 서명해 협상 결과를 문서화한 일본을 앞세워 한국을 압박하고 있습니다. 러트닉 장관은 일본이 5500억 달러를 투자하는 사례를 언급하며 한국에도 같은 방식의 합의를 요구했습니다. 일본의 합의 내용은 투자 종목은 미국이 결정하고 일본은 45일 이내 투자금 송금할 것과 투자금 회수 전까지는 수익을 50:50 분배, 투자금 회수 이후에는 미국이 90%를 가져간다는 방식입니다. 한국에도 사실상 동일한 조건을 강요하는 셈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 내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미국 경제정책연구센터(CEPR) 설립자 딘 베이커 선임 경제학자는 지난 11일(현지시각) 홈페이지에 “트럼프 대통령은 일본과 한국이 각각 5500억 달러, 3500억 달러를 내고 미국이 원하는 대로 투자할 수 있게 했다고 자랑했다”고 지적했습니다. 이어 “만약 이 발언이 사실과 유사하다면 두 나라가 이 합의를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라고 평가했습니다.
그는 또 “만약 관세율이 다시 25%로 올라간다면 한국의 대미 수출은 125억 달러 감소할 것이고, 이는 GDP의 0.7%에 해당한다”고 분석했습니다. 즉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에 ‘125억 달러 수출을 지키려면 3500억 달러를 내라’고 요구하는 꼴이라는 겁니다. 베이커는 “차라리 그 돈의 20분의 1만 써도 한국은 훨씬 더 유리하다”며, 피해 기업과 근로자를 직접 지원하는 것이 낫다고 주장했습니다.
韓, 위태로운 지정학적 위치에 복합적인 협상
물론 통상적·경제적 효과만 보면 그의 분석은 설득력이 있지만,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와 대중국 견제, 북한 문제 등을 고려하면 간단히 결정할 사안은 아닙니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이를 모를 리 없기 때문에 앞으로 대한민국은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에 놓일 수 있습니다. 미국이 3500억 달러 투자를 받지 못하면 25% 관세를 유지할 것이고, 가격 경쟁력을 잃은 한국 기업은 결국 미국 내에서 소비자들을 잃게 됩니다. 그 타격은 한국 언론의 집중 비판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반대로 일본처럼 협상을 마무리하면, 막대한 투자 비용을 지출하고도 15% 관세율에 만족해야 하며 제조업 공동화라는 또 다른 부담이 뒤따를 수 있습니다. 이재명 정부는 어느 쪽을 택하더라도 실패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말 그대로 외통수에 몰린 상황입니다.
이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협상 표면은 거칠고 과격하며 불합리하고 비상식적이지만 최종 결론은 합리적으로 귀결될 것이고,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며 “최소한 합리적인 사인을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서명하지 않았다고 비난하지 말아달라”고 당부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입니다.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인데, 지금 어딘가에서는 웃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은 여야, 좌우, 진보와 보수의 문제나 정파·권력 다툼에 몰두할 때가 아닙니다. 경제 전문가인 이철 박사의 최근 책 <다시 시작된 전쟁>의 한 대목을 옮겨봅니다.
“우리나라는 과거의 성과에 취해 지금 여러 방면으로 경쟁력을 상실하고 있다. 더욱 무서운 것은 상당수 국민이 이런 현실을 잘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구상의 그 어떤 국가보다도 위기 상황에 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 대한 인식이 너무나도 부족하다. 우리나라 같은 국가는 주변 강대국의 의도를 읽고 먼저 치고 나가야 한다. …(중략)…한미 관계나 한중 관계라는 기존 쌍무 관계의 도식에 사로잡히지 않고 전 세계 국가와 역학 관계를 고려한 더 좋은 전략과 의견이 쏟아지는 모습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우리 모두, 그리고 우리의 후손들을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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