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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진 칼럼] 3류냐 5류냐, 기로에 선 한국 정치

30년 전 이건희 “정치 4류, 기업 2류”

이재명 정부 정치는 몇점이나 받을까

‘기업 중심’ 말하며 ‘옥죄기’법 쏟아내

이러다 ‘경제 망친 정치’ 오명 쓸 수도





“우리나라의 정치는 4류, 관료와 행정조직은 3류, 기업은 2류입니다.”

김영삼 정부 때인 1995년 4월 13일 당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중국 베이징 주재 한국 특파원들과의 오찬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금까지도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이 발언은 자칫 세상에 공개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이 회장과 특파원들과의 이 오찬 자리의 모든 대화는 ‘비보도 원칙’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충격적인 발언을 들은 특파원들은 서울 본사에 지체 없이 보고했고 특정 매체를 시작으로 이에 대한 비보도 원칙은 깨졌다.

그로부터 16년이 지난 2011년 이명박 정부 때 이 회장은 서울 남산 하얏트호텔에서 열린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단 회의에 참석하면서 기자들로부터 ‘현 정부의 경제 성적에 몇 점 정도 주겠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는 “과거 10년에 비해 상당한 성장을 했으니…”라고 답하려다 ‘흡족하다는 말이냐’는 추가 질문에 “낙제는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발언 맥락상 4류보다는 낫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지만 ‘낙제’가 언급됐다는 점에서 그렇게 단정하기도 어렵다.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1993년 ‘신경영 선언’을 하고 있다. 사진 제공=삼성


다시 14년이 흐른 지금 이재명 정부의 정치는 기업인들로부터 몇 점이나 받을 수 있을까. 일단 이재명 대통령이 취임 후 ‘경제 우선, 기업 중시’를 앞세우고 있는 만큼 아직은 평가가 유보적일 수 있다. 이 대통령은 11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남은 4년 9개월은 도약과 성장의 시간”이라며 “대한민국이 힘차게 도약하도록 총력을 기울이겠다”고 말했다. 지난주 ‘바이오 혁신 토론회’에서는 “규제의 기본은 지키되 산업 발전의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정부가 혁신하겠다”고 밝혔다. 6월 13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5대 그룹 총수 및 경제 6단체장과의 간담회에서는 “국가 경제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최선을 다할 생각”이라며 “불필요하고 행정 편의를 위한 그런 규제들은 과감하게 정리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의 말과 달리 기업들이 겪어야 했던 현실은 혹독했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국내 주요 기업들이 지난달 25일 열린 한미 정상회담의 성공을 위해 총력전을 쏟는 동안 노란봉투법과 ‘더 센’ 상법 개정안을 속전속결로 처리했다. 노란봉투법 통과 이후 현대차 노동조합의 사흘간 부분파업을 시작으로 국내 산업 현장 곳곳에서 파업 리스크가 확산하고 있다. 자산 2조 원 이상의 상장사가 이사를 선임할 때 집중투표제를 의무적으로 적용하는 내용을 담은 더 센 상법 개정안 통과의 후과도 크다. 많은 기업이 “해외 투기 자본의 경영권 위협에 무방비로 노출됐다”며 두려움에 떨고 있다. 일각에서는 “한국에서는 더 이상 사업을 할 수 없다”는 목소리도 들린다.



이재명 대통령이 11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대통령실통신사진기자단


이대로 가면 우리 정치가 4류를 뚫고 5류 아래로 추락할 수도 있다. 정부와 여당은 자신들이 개입해야 경제를 균형 있게 잘 키울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부터 버려야 한다. 노란봉투법의 경우 원·하청을 교섭에 참여시켜 노사 갈등 구조를 개선하겠다는 입법 취지와 달리 노사 갈등을 되레 증폭시키고 있다. 더 센 상법 개정안은 소수 주주의 권리 보호와 경영 투명성 제고 등에 긍정적이라고 주장하지만 기업의 의욕을 꺾는 역효과가 더 크다.

경제를 살리는 것이 좋은 정치다. 투자와 일자리 창출의 주역인 기업을 억누르는 정치로는 어떤 정부도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없다. 중국 고대 철학자 노자는 ‘도덕경’에서 “위무위 사무사(爲無爲 事無事)”라고 했다. 하지 않음을 행하고 일하지 않음을 일하라는 뜻이다. 그래야 백성들이 배불리 먹고 태평성대를 누리며 살 수 있다고 노자는 믿었다. 경제에 미치는 악영향을 아랑곳하지 않고 노란봉투법, 상법 개정안 등의 규제 법안들을 강행 처리한 여당이 이 격언에 귀 기울여야 한다.

이 대통령은 이달 2일 국무회의에서 “새는 양 날개로 난다”며 “기업과 노동 둘 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기업들은 거대 여당의 일방적인 기업 규제 및 친노동 입법 앞에 크게 낙담하고 있다. 이래서는 국내 투자와 고용이 살아날 수 없다. 이재명 정부도 ‘경제를 망친 정치를 했다’는 오명을 쓰게 될 수 있다. 이 대통령 취임 100일을 갓 넘은 지금 한국 정치는 기로에 서 있다. 3류를 넘어 1류까지 갈 것이냐 아니면 5류 아래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냐, 결과는 정부·여당 하기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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