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봄, 미국 중부의 작은 마을 켄터키주 파이크빌에 백인 우월주의 단체들이 집결했다. 나치 문양과 총기로 무장한 이들은 “동질성을 지켜야 한다”는 구호를 외치며 거리를 행진했다. 백인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고 빈곤과 보수 성향이 짙은 지역적 특성을 이용해 극우 세력이 무대로 삼은 것이다. 그러나 파이크빌 주민들의 반응은 단순하지 않았다. 미국에서 가장 보수적인 지역으로 꼽히지만 스스로를 ‘레드넥(가난하고 학력이 낮은 백인 우월주의자)’으로만 치부당하는 데에는 불쾌감을 드러냈다.
앨리 러셀 훅실드는 인구 7000명의 조용한 동네였던 파이크빌에서 벌어진 백인 우월주의 행진을 계기로 “왜 이런 지역에서 분노와 소외가 극단주의로 이어지는가”라는 질문을 품었다. 이후 6년에 걸쳐 80여 명의 주민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들으며 ‘도둑맞은 자부심’을 집필했다. 공직자와 의사 같은 엘리트부터 실직한 중산층, 마약 중독자, 민주·공화 양당 지지자, 네오나치주의자까지 진영과 계층을 가리지 않고 기록한 이 책은 그가 일관되게 탐구해온 주제인 “감정은 어떻게 사회 구조와 정치적 선택으로 이어지는가”를 다시 묻는다. 저자는 미국 UC버클리 사회학과 명예교수로 수십 년간 감정과 사회 구조의 관계를 연구해온 대표적 학자다. ‘감정노동’ ‘두 번째 교대’ ‘외주화된 자아’ 같은 개념을 제시하며 현대 사회의 불평등과 감정의 작동 방식을 밝혀왔다.
그동안 미국 백인 노동자층의 보수화를 분석한 책은 여럿 있었지만 ‘도둑맞은 자부심’은 생생한 현장 취재를 통해 자부심과 수치심이라는 감정이 어떻게 정치적 극단성으로 분출되는지 세밀하게 추적했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저자가 방대한 인터뷰를 통해 밝힌 보수 유권자들의 심리적 기저에는 ‘자부심의 역설’이 자리한다. 이들은 “열심히 일하면 성공한다”는 개인 책임론을 자부심의 근원으로 삼아왔다. 그러나 전통 산업의 붕괴로 일자리와 존엄을 잃은 뒤 느낀 수치심은 자책이 아니라 울분으로 이어졌다. ‘나의 권리’가 새치기당했다는 감각, 불공정에 대한 응축된 불만이 극단주의로 향하게 한 것이다.
이러한 울분은 이민자뿐 아니라 엘리트들에게도 향했고 정치인들은 이를 부추기며 극단주의에 기름을 부었다. 도널드 트럼프는 자신을 "엘리트에게 공격받는 피해자”로 포장하며 피해 의식을 공유하는 노동자들의 지지를 끌어냈다. 책은 트럼프 집권 이후 관세 전쟁과 물가 상승, 또 사적 이익 추구에 대한 스캔들 등 각종 잡음 속에서도 여전히 그를 굳건히 믿고 지지하는 백인 노동자층의 심리를 전한다. 이들은 정부 예산의 낭비를 줄이려는 시도는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에게 필요한 푸드 스탬프나 메디케어·메디케이드 같은 복지 제도는 건드리지 않으리라 기대했다.
사회적 분열은 늘 존재했지만 심리적 내전 상황으로 치닫는 것은 최근의 일이며 이는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분노를 촉발한 경험과 환경을 추적하는 저자의 시선은 한국을 포함해 세계 곳곳이 앓고 있는 정치적 극단주의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초가 된다. 극단적 대립과 양극화가 심화되는 시대일수록 반대편을 바라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상대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집단’으로 낙인찍는 대신 그들의 감정과 환경을 경청하고 공감하려는 시도에서 갈등 해결의 길이 열린다. 정치는 결국 ‘감정을 담는 그릇’이다. 자부심과 수치심이라는 감정을 일으킨 정치적 변화를 탐구한 이 책은 우리가 외면해온 감정의 지형을 새삼 돌아보게 한다. 2만 3000원.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