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은평구 북한산 자락에 자리해 한국 개신교 140년 역사를 집대성한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에는 정작 십자가가 눈에 띄지 않는다. 교파를 초월해 기독교계가 힘을 합쳐 문을 열었지만 건물 외관이나 전시실에서 종교 색채는 찾아보기 어렵다. 대신 문화관 로고를 비롯해 원을 형상화한 이미지가 주를 이룬다. 류재인 학예팀장은 12일 “서로 존중하고 평화를 위해 화합하자는 취지”라며 “비기독교인들도 편안하게 와서 종교에 대한 편견을 깨는 공간이 될 수 있도록 구성했다”고 설명했다.
주전시 공간인 지하 1층 상설전시실은 ‘신앙이 아름다웠던 순간들’을 주제로 한국 기독교의 발자취를 5부로 나눠 담았다. 대한제국 말기 첫 선교사의 발걸음부터 일제강점기, 광복과 전쟁, 산업화·민주화, 민주화 이행기까지 시대별로 구성했다. 이곳에서는 한국에 온 해외 선교사들뿐 아니라 한국 기독교인들이 남긴 총 185점의 전시물을 만날 수 있다. 눈에 띄는 전시품으로는 제임스 게일 선교사가 한국어로 번역한 17세기 기독교 소설 ‘천로역정’, 재한 외국인 선교사들이 발간한 월간 선교 잡지 ‘코리아 미션필드’ 전질 등이 있다.
일제강점기와 민주화 시기에 독립운동, 반독재 운동을 함께했던 한국 기독교의 역사도 살펴볼 수 있다. 조선시대 기독교인들은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사람’이었기에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에 대한 열망도 클 수밖에 없었다. 기독교인이 주축이 돼 전개된 항일운동의 역사를 보여주는 사료들이 다수 전시됐다. 남궁억이 도안하고 배화여학교 학생이 수놓은 1900년대 초반 무궁화 자수 지도는 당시 여학생들의 나라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은 역사 속에서 기독교의 ‘공’뿐 아니라 ‘과’도 다뤘다는 점도 특징이다. 일제의 기독교 박해 속에서 결국 순응했던 교인들의 모습을 담은 전시품 중 하나는 ‘히노마루 부채’다. 당시 일장기를 부채에 그려 전쟁에 나간 군인들에게 보내는 데 협조했던 현실을 반영한 자료다.
2층에는 두 개의 기획전시실이 마련됐다. ‘기획전시 1’은 ‘아주 보통의 주말’을 주제로 주말의 역사와 기독교 안식 개념을 시민 참여 자료와 함께 소개한다. 류 팀장은 “주일, 주말, 안식일을 두고 현대인의 휴식에 어떤 해답을 제공할 수 있을까를 질문하고자 한 전시”라고 소개했다.
‘기획전시 2’는 선교 140주년을 기념해 ‘to 조선, from 한국’이라는 제목으로 복음을 전해받던 나라에서 이제 세계 곳곳으로 선교사를 파견하는 오늘의 한국 교회 모습을 다룬다. 이곳에서는 미국 북감리회 선교사 로제타 홀이 1906년 제물포에서 쓴 엽서를 만날 수 있다. 이 엽서에는 “영국 제독을 환영하는 자리에 영국과 일본의 국기만 있을 뿐 한국의 깃발은 보이지 않아 슬프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현재 한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해외 선교사를 파견하는 국가이기도 하다. 최근 선교사들의 활약상도 기획전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전체 교계를 아우르는 기독교박물관 건립에는 14년이 걸렸다. 2011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의 설립추진위원회 조직에서 출발해 2017년 사단법인, 2020년 재단법인을 창립한 뒤 2023년 착공했다. 연면적 1341㎡(지하 1층·지상 2층) 규모로 국비·서울시 예산 35억 원을 포함해 총 100억 원이 투입됐다. 향후 5층 규모로 확장할 계획이다.
현재 보유 자료는 총 2500점으로 전시품 외에는 수장고에 보관 중이다. 앞으로 소장품을 확대할 방침이지만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은 전국에 흩어져 있는 교회 박물관들의 허브 역할에 더 무게를 둔다. 기획전시실은 기독교 단체들의 전시 공간으로 개방할 계획도 갖고 있다. 향후 일반일을 대상으로 하는 교양 강좌 등도 마련된다.
이날 열린 개관 기념식에는 이영훈 한국기독교역사문화재단 이사장, 김종혁 한국교회총연합회 대표회장, 조성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회장 등 교계 주요 인사뿐 아니라 오세훈 서울시장이 참석했다. 전시품을 기증한 기증자와 후원자들도 참석해 감사패를 받았다. 이날 이영훈 이사장은 개관예배 설교에서 “기독교역사문화관은 한국기독교 전체의 흐름을 담을 수 있는 문화공간”이라며 “국가 지원을 받아 조성된 만큼 시민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공공성 높은 공간을 지향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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