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1(포뮬러원) 자동차 경주를 본 일이 있는가. 유심히 보면 어떤 F1 자동차의 타이어에는 홈이 없다! 이제 골프 얘기를 해보자. 아이언과 웨지의 페이스 표면에는 가로 방향으로 홈이 파여 있다. 그루브다. 클럽 제조업체들은 그루브가 마모되면 스핀 성능이 저하된다고 말한다.
다시 F1 이야기. 세계 최고의 스피드를 겨루는 자동차 경주에서 왜 홈이 없는 타이어를 사용할까. 가장 큰 이유는 지면과의 마찰을 최대한 높이기 위해서다. 마찰력이 커야 급가속과 급감속 등에 유리하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웨지에 그루브가 없어도 스핀 성능에는 큰 차이가 없는 게 아닐까’라는 호기심이 일었다.
“그루브 없어도 백스핀 9000rpm 넘네”
실험 계획 후 가장 큰 어려움은 그루브 없는 ‘민무늬 웨지’를 구하는 것이었다(국산 골프클럽 브랜드가 없다!). 우리는 56도 샌드웨지의 그루브를 갈아 없애기로 했다. 공구상가가 밀집한 서울 중구 황학동의 어느 칼갈이 점포를 찾아가 평면 연삭기로 그루브를 갈아냈다. 주인은 “평생 칼날을 세웠지만 이런 건 처음 갈아본다”며 “일반 스테인리스스틸과 달리 훨씬 단단해 잘 안 갈린다”고 했다.
우리는 핑골프의 도움을 받아 일반 샌드웨지와 그루브 없앤 웨지를 5회씩 풀 스윙으로 때리며 백스핀 변화를 살폈다. 핑은 과거 미국골프협회(USGA), 미국프로골프(PGA) 투어와의 그루브 소송에서 이겼을 만큼 그루브 관련 기술력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먼저 그루브가 있는 일반 샌드웨지의 평균 백스핀은 9343rpm(분당 회전수)으로 나타났다. 민무늬 웨지의 평균 백스핀은 9193rpm. 두 웨지의 백스핀 차이는 150rpm에 불과했다. 민무늬 웨지로 때렸을 때 스핀 양이 조금 줄긴 했지만 과연 의미 있는 차이인지 여부에는 물음표가 따랐다.
물 뿌리자 2568rpm으로 뚝 감소
다시 F1 이야기. 비가 오거나 노면이 비에 젖어 있으면 F1 자동차들도 홈이 파인 타이어로 깔아 끼운다. 타이어와 지면 사이에 수막이 생겨 미끄러지는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웨지의 그루브도 수막 방지와 보다 깊은 연관을 갖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우리는 웨지 페이스와 볼에 스프레이를 이용해 물을 뿌려가며 테스트를 진행했다. 그루브가 있는 일반 샌드웨지의 백스핀은 9326rpm으로 건조한 상태일 때(9343rpm)와 큰 차이가 없었다. 그루브가 나름의 역할을 했다는 뜻이다.
민무늬 웨지에서는 놀랄만한 변화가 생겼다. 평균 백스핀이 4963rpm으로 뚝 떨어졌다. 다섯 차례 샷의 스핀 양도 4056rpm, 2568rpm, 3269rpm, 9200rpm, 5724rpm으로 들쑥날쑥했다. 가장 높은 백스핀과 가장 적은 백스핀 차이는 6632rpm이나 됐다. 가장 적은 2568rpm은 습기가 있을 때 일반 웨지의 평균 백스핀(9326rpm)보다 72%나 감소한 수치였다.
“그루브는 물기와 이물질 있을 때 빛나는 역할”
실험을 진행한 핑 테크팀의 조승진 차장은 “마른 상태일 때는 그루브가 없더라도 페이스 자체의 마찰과 로프트 각도 영향으로 백스핀에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며 “하지만 물이 있는 상태에서는 그루브 유무에 따라 수막현상에 확실한 차이가 생기면서 백스핀 성능에도 크게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풀이된다”고 했다.
습기가 있을 때 민무늬 웨지 샷의 스핀 편차가 큰 이유는 임팩트 지점에 따른 것으로 보였다. 물이 페이스와 볼에 고르게 분포하는 게 아니라 방울 형태로 맺혀 있는데 물방울이 많은 지점에 임팩트가 되면 미끄러지는 현상이 커지면서 백스핀이 확 줄고, 물이 상대적으로 적은 지점에 임팩트가 될 때는 그나마 스핀 성능이 유지되는 것으로 짐작됐다.
그렇다면 그루브는 백스핀과는 큰 연관성이 없는 걸까. 핑 테크팀의 우원희 팀장은 “아니다”라고 했다. 우 팀장은 “장비 규정을 보면 그루브의 깊이, 폭, 간격 등에 제한을 둔다. 또한 그루브의 형태에 대해서도 규정을 하고 있다”며 “이는 그루브가 그만큼 백스핀과 관련이 깊다는 방증이 아니겠느냐. 우리의 실험이 아직 그걸 알아낼 만큼 정교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이번 실험은 풀 스윙으로 매우 간단하게 진행했지만 스윙 스피드가 느린 하프 샷이나 칩 샷 등에서는 그루브 마모 정도에 따라 스핀 성능이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우리는 항상 건조한 사막에서 골프를 치는 게 아니다. 이른 아침에는 잔디에 이슬이 맺혀 있고, 여름에는 언제 폭우가 쏟아져도 이상하지 않다. 또한 골프는 연습장의 매트 위가 아닌 야외에서 이뤄진다. 때론 러프에서, 때론 거친 땅에서 샷을 날린다. 짧은 거리에서는 풀 스윙이 아닌 칩 샷이나 컨트롤 샷도 필요하다. 그루브는 이럴 때 더욱 빛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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