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크고 작은 이유로 서로를 미워하고 다투며 괴로워한다. 그러나 우주적 시선으로 보면 그 모든 영광과 비극은 한 줌의 먼지일 뿐이다. 덧없다 말하기엔 너무도 찬란한 인생에서 서로 사랑하기에도 시간은 부족하다.
제주 서귀포 포도뮤지엄에서 9일 개막한 특별전 ‘우리 이토록 작은 존재들’은 인류 보편의 기나긴 문화예술사를 통해 반복돼 온 이 오래된 주제를 다시 꺼내온다. 중요한 만큼 자주 탐구된 주제를 다루는 일은 용기가 필요하다. 자칫 뻔하다는 비판에 직면할 수 있어서다. 하지만 전시는 이 오래된 감정을 오늘날의 언어와 시각으로 새롭게 번역한다. 세계적으로 증오와 분열이 가속화되고 있는 가운데 잊고 있던 이해와 사랑이라는 해묵은 가치를 일깨워주는 역할을 훌륭히 수행한 셈이다. 전시를 기획한 김희영 포도뮤지엄 총괄디렉터는 “가끔씩 우주의 스케일을 떠올려본다는 것은 생각의 분모를 키워 우리 일상의 고민과 문제를 초월할 힘을 준다”며 “이런 경험을 관람객들과 공유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4개의 공간으로 구분된 전시의 도입부는 일단 충격으로 시작한다. 오늘날 세계를 뒤덮은 분쟁과 공포, 불안을 모나 하툼과 제니 홀저 등 동시대 현대미술 거장들이 제작한 장대한 스케일의 작품들로 전한다. 수십 개의 철골 구조물에 1.6톤의 콘크리트 덩어리가 불안하게 매달린 하툼의 ‘남은 것들(Remains to be Seen)’은 폭격으로 무너진 건물의 잔해를 떠올리게 한다. 레바논 팔레스타인 난민 가정에서 태어난 작가는 우리가 믿는 일상의 안정감이 사실은 얼마나 허약한 기반 위에 있는지를 깊숙이 통찰하는 작품들로 주목받아왔다. 머리 위로 매달린 ‘돌의 숲’이 주는 긴장감을 지나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20~2021년 트위터로 쏟아낸 296개의 증오와 분열의 말들을 납과 구리판에 고고학 유물처럼 새긴 홀저의 작품 ‘저주받은(Cursed)’과 마주한다.
그러나 고통과 증오는 찰나다. 전시작 대다수는 희망과 사랑을 말하는 것에 좀 더 집중한다. 홀저의 작품 뒤로는 라이자 루의 대형 설치작 ‘보안 울타리(Security Fence)’가 보인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인종 분리 정책)를 상징하는 가시 철조망이 금빛의 비즈들로 뒤덮여 반짝인다. 작가는 인종 차별을 받았던 20인의 줄루족 여성들과 1년간 이 작업을 완성했는데 그녀들은 “우리가 철조망을 사랑으로 뒤덮고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인류의 보편적 권리를 말하는 미국 독립선언문의 첫 문장을 대중의 언어로 다시 쓴 애나벨 다우의 ‘인간 삶의 과정에서’와 같은 작품 역시 ‘손을 내밀기 위해’ ‘눈물을 참기 위해’ ‘바라보기 위해’ 등 희망의 언어들로 공명한다.
2전시실은 시간의 장엄함과 인간의 유한함을 직관적으로 느끼게 하는 작품들로 채워졌다. 2전시실의 벽면은 별이 빛나는 우주처럼 보이는 수미 카나자와의 대형 작품이 가득 채우고 있다. 신문지 위에 연필로 매일 선을 그어 완성한 작품인데 가까이에서는 인간사의 고통으로 가득한 뉴스 헤드라인이 보이지만 멀리서는 그저 아름다운 밤하늘로 보인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새하얀 복도를 560개의 시계가 가득 채우고 있는 이완 작가의 ‘고유시’도 흥미롭다. 저마다의 속도로 제각각 흐르는 시간 속에서 비처럼 쏟아지는 초침의 소리를 듣다보면 우리는 결국 시간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을 함께 걸어가는 비슷한 존재라는 역설적 깨달음이 찾아온다.
이번 전시는 김 총괄이 이끄는 포도뮤지엄의 방향성이 읽힌다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통상 관광지의 미술관은 진지한 담론보다는 대중성과 볼거리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새로운 전시에서 만난 작품들은 인스타그램으로 가볍게 소비되고 끝내기에는 아쉬운 날카로운 주제 의식이 돋보인다. 특히 동시대 아시아 작가를 소개하는 3전시실에서 김한영, 쇼 시부야 등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를 과감하게 선택하며 작가 발굴이라는 역할에도 욕심을 낸 모습이다.
빛나는 유리 오브제로 방을 가득 채우는 테마 공간 등을 마련해 대중성도 놓치지 않았다. 뮤지엄은 또 이번 전시를 기획하며 산책로와 야외 정원을 새로 조성해 로버트 몽고메리와 우고 론디노네, 김홍석의 조각 등을 설치하기도 했다. 이중 “사랑은 어두움을 소멸시키고 우리 사이의 거리를 무너뜨리는 혁명적 에너지다”라는 메세지를 전하는 몽고메리의 작품은 이번 전시의 주제를 관통하는 메시지로도 눈길을 끈다. 전시는 내년 8월 8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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