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전시장 한가운데 서로 다른 크기의 지구 여러 개가 서로 다른 높낮이로 매달렸다. 우리는 마치 같은 세계를 사는 듯 하지만 사실은 전혀 다른 세계를 살지도 모른다는 불평등의 감각을 직관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검은 바다와 불타버린 대륙을 표현한 작품은 ‘그는 잿더미의 왕이 되기 위해서라도 나라가 타오르는 것을 볼 것이다’라는 긴 제목을 달고 있다. 미국 드라마 ‘왕좌의 게임’의 유명한 대사를 빌려왔는데 제작 연도를 보면 또 다른 맥락이 상상될 수밖에 없다. 올해 2기 정권을 시작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1기 집권 말인 2019년 제작된 작품은 당시 미국 사회의 정치적 현실과 교차하며 단순한 조형적 실험을 넘어선 의미를 갖는다.
서울 용산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에서 동시대 미국을 대표하는 예술가 마크 브래드포드의 개인전 ‘킵 워킹’이 개막했다. 작가의 국내 첫 개인전이자 아시아 최대 규모 전시다. 미술관 공간에 맞춰 제작된 신작을 포함해 작가의 지난 20여 년 작품 세계를 조망하는 40여 점의 작품이 선보인다.
브래드포드의 작업은 ‘사회적 추상(social abstraction)’이라고 불린다. 그의 작품에는 조형적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순수 추상과 달리 사회적 또는 정치적 맥락이 진하게 담겨 있기 때문이다. 전시를 위해 내한한 작가는 “좀더 정확하게는 사회적 기억을 담은 추상이라고 말하고 싶다. 세상의 흔적과 그림자 혹은 유령 같은 것들이 담긴 작업”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작품 재료를 고르는데 신중하다. 그는 자신이 거주하는 지역의 거리에서 광고 포스터와 전단지, 미용실 파마지, 신문지 등을 수집해 이들 재료가 사용되고 버려진 맥락과 역사를 작품에 녹여낸다.
이런 작업 방식은 그의 삶과 관계가 깊다. 브래드포드는 미국의 전통적인 흑인 집단 거주 지역이자 저소득층 밀집 지역인 로스앤젤레스 사우스센트럴 출신으로 어릴 시절부터 인종 갈등과 사회 불평등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살아왔다. 어머니의 미용실에서 일하다 30대가 돼서야 정식 예술 교육을 받았던 그는 “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에 이미 너무나도 많은 역사를 겪었고 그 역사를 내 작업 안에 가져가고 싶었다. 과거의 경험을 내 안에서 분리하거나 마치 다른 존재인 듯 이야기를 새로 쓰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심지어 그는 성소수자다. 미국 사회에 계급이 있고 정점을 백인 이성애자 남성이 차지한다면 흑인 동성애자 남성의 자리는 정반대편이라고 봐도 좋다. 인종과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의 교차점에 선 이들은 흑인 커뮤니티 내에서도 강하게 배척받았다. “내가 속한 커뮤니티의 이야기에만 집중한다”는 작가는 언제나 인종 차별과 성소수자 탄압, 경제적 불평등과 같은 미국 역사의 핵심 갈등에 주목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미국이 가진 모순을 가장 예술적으로 보여준 작가 중 한 명이 됐다.
그렇기에 그의 작품은 미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를 필요로 하지만 그만큼 다층적인 의미를 지닌다. 예컨대 노란 바지를 입은 채 골반을 경쾌하게 흔들며 거리를 걷는 흑인 남성의 뒷모습을 가만히 비추는 20년 전 영상 작품 ‘나이아가라’는 마치 공포영화 도입부와 같은 긴장감을 선사한다. 당시 이런 공개적인 젠더 표현은 언어는 물론 물리적 폭력에 노출될 위험이 매우 높았기 때문이다. 배우 마릴린 먼로가 섹시한 ‘먼로 워킹’을 선보여 불세출의 스타로 떠오른 1953년 동명의 영화 ‘나이아가라’에서 영감을 얻었다니 더욱 아이러니하다.
전시장 초입에서 관람객을 맞이하는 ‘떠오르다(Float)’도 마찬가지다. 600㎡ 규모의 거대한 전시장 바닥을 수백 개의 찢어진 캔버스 조각과 종이, 로프 등으로 제작한 무지개빛 색채의 바다가 가득 채웠다. 노랑·파랑·분홍·초록색의 띠는 이 위를 걷는 관람객이 많아질수록 부드러워진 끝에 하나로 어우러질 것이다. 성소수자들이 꿈꾸는 다양성의 무지개가 관람객들의 걸음으로 완성되는 셈이다. 작가는 “나에게 있어 걷기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인내의 행위와 같았다”며 “관람객들 역시 이 작품 속에서 계속 움직여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전시는 내년 1월 25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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