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가평군 조종면에 거주하는 70대 여성 A 씨는 지난달 16일부터 쏟아진 폭우로 집이 물에 잠겼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그날 이후 A 씨는 환상에 시달려야 했다. 손주들이 무섭다고 우는 모습과 비가 몰아치는 가운데 우산에 의존해 빠져나오던 장면이 밤마다 그를 괴롭혔다. 지금까지도 A 씨는 “하필 그날 손주들을 불러 아이들에게 그런 일을 겪게 한 것 같다”며 우울 증세를 보이고 있다.
사회·자연 재난이 반복되면서 재난 트라우마 관리에 대한 중요성이 커지고 있지만 복구의 초점이 여전히 경제적 피해에만 맞춰져 정신건강은 소외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7일 행정안전부의 ‘재난 경험자 심리상담 실적’에 따르면 재난 관련 상담은 매년 느는 추세다. 2019년 7521건이었던 재난심리회복지원센터의 대면 및 비대면 상담 건수는 2020년 1만 1314건으로 50.4% 급증했다. 코로나19를 계기로 질병 등 사회적 재난이 정신건강에 미치는 영향이 본격적으로 조명된 데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이후 상담 건수 역시 2021년 1만 313건에서 지난해 1만 2733건으로 늘었다.
재난심리회복지원센터는 재난 발생 시 피해자와 이재민의 심리 회복을 돕는 시설로 행안부가 대한적십자사에 위탁해 운영하고 있다. 상담활동가를 모집해 심리적 충격을 받은 이들에게 상담을 제공하고 전문 치료가 필요한 경우 의료기관으로 연계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상담 수요가 늘고 있는 것과 달리 행안부의 ‘재난심리회복지원’ 예산은 지난해 11억 9000만 원에서 올해 9억 4000만 원으로 되레 감소했다. 행안부는 “매년 계약직으로 채용했던 인력들을 적십자사 소속 정규직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인건비가 예산에서 제외된 것”이라며 “나머지 부분은 지난해와 동일하다”고 설명했다.
정규직 전환이 이뤄졌지만 현장에서는 일손이 부족하다는 불만이 제기된다. 올해 기준 전국 17개 센터의 재난 심리 담당자는 각 2명뿐이다. 2명엔 센터장이 포함되지만 적십자사의 다른 업무를 겸하고 있어 사실상 1명이 대부분의 업무를 전담하는 실정이다. 경기지사 담당자 B 씨는 “올겨울 폭설 피해가 있었을 때 하루 만에 양평에서 안성까지 이동한 적도 있다”며 “상담활동가들의 관리부터 교육까지 모두 혼자 책임져야 해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상담사의 지역 간 편차가 크다는 문제 또한 있다. 정규직인 아닌 ‘활동가’ 형태로 모집하다 보니 인력 확보가 어려운 곳이 발생한다. 실제 경기 활동가는 120명인 반면 경남은 57명으로 절반 수준에 그친다.
전문가들은 센터가 피해자들의 마음 상태를 점검하는 1차 기관인 만큼 지원을 더욱 늘려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백종우 경희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기후위기로 대규모 자연 재난이 앞으로 더욱 빈번해질 것”이라며 “재난 트라우마는 집이나 회사 등 일상적인 공간에서도 쉽게 유발될 수 있어 초기 진단과 꾸준한 사후 관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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