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이 “배임죄에 대해 제도적 개선을 모색해야 될 때가 됐다”며 배임죄 완화를 공식화했다. 집중투표제 실시를 담은 2차 상법 개정안, 노란봉투법 등의 국회 통과를 앞두고 재계의 우려가 집중 제기되자 비판 여론을 다독이기 위한 의도로 풀이된다. 특히 “과도한 경제 형벌로 기업 활동이 위축되지 않도록 ‘경제 형벌 합리화 태스크포스(TF)팀’을 가동하겠다”며 ‘친기업’ 행보를 강조했다.
경제 처벌 조항 ‘전수조사’ 지시
이 대통령은 30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비상경제점검TF 회의에서 “최근 한국에서 기업 경영 활동을 하다가 잘못하면 감옥 간다면서 국내 투자를 망설이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며 “불필요한, 꼭 필요하지 않은 규제들은 최대한 해소 또는 폐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밝혔다.
기업에 대한 규제 중에서도 특히 과도한 경제 형벌을 줄이기 위해 ‘경제 형벌 합리화 TF’를 만들어 각 부처가 경제 법령 처벌 조항을 전부 조사하도록 지시했다. 이 대통령은 “이번 정기국회부터 본격적인 정비를 해 ‘1년 내 30% 정비’ 같은 명확한 목표를 설정해 추진하겠다”면서 구체적인 목표 설정도 강조했다.
이 대통령이 콕 집어 언급한 과도한 경제 형벌은 배임죄다. 경영인이나 직원들이 신의성실의 원칙을 어기고 이익을 취하거나 재산상 손해를 발생시킬 때 적용되는 배임죄는 그동안 자유롭고 창의적인 기업 경영 활동의 걸림돌로 여겨졌다. 경영인들이 위험을 감수하지 않기 위해 소극적으로 업무에 임하거나 중요한 의사 결정을 회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재계의 지적을 감안해 이 대통령은 지난해부터 배임죄 완화 의사를 지속적으로 밝혀왔다. 이 대통령의 이날 발언은 말 뿐인 제도 개선이 아닌, 실질적인 목표를 갖고 속도감 있게 추진하겠다는 방침을 강조한 것이다. 이 대통령은 “신뢰에 위반됐다는 이유로 경제적·재정적 제재 외에 추가로 형사 제재까지 가하는 것은 국제적 표준에 과연 맞느냐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 발 나아간’ 주문…배임죄 전면 폐지로 이어질까
이 대통령이 추진하는 배임죄 완화는 국회에서 입법이 진행 중인 법안들보다 한발 더 나아갔다는 설명도 제시됐다. 회의에 참석한 김용범 정책실장은 브리핑에서 “최근 대통령이 여러 경제·기업인들과의 만남을 통해 외국인들이 한국에 투자를 꺼리고, 배임죄에 대한 공포가 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이 부분에 대해 걱정을 하시고 (배임죄 완화와 관련해) 조금 더 나아간 것 같다”고 밝혔다.
현재 국회에는 상법상 특별배임죄를 폐지하고 형법에 배임죄 위법성 조각 사유로 ‘경영상 판단’을 원칙으로 명문화한 상법·형법 개정안이 각각 발의돼 있다. 재산상 이익을 취하려는 의도 없이 경영상 합리적인 판단을 한 경우에는 처벌 대상에서 제외하는 내용 등이다. 하지만 이들 법안은 법제사법위원회에 계류돼 본격적인 심사가 이뤄지진 않았다.
김 실장이 “조금 더 나아갔다”고 밝힌 만큼 향후 정부와 국회가 추진하는 배임죄 관련 법안은 적용 대상을 대폭 줄일 가능성이 있다. 사실상 배임죄를 폐지하는 방향이 될 수 있다는 관측이다. 다만 김 실장은 “입법은 국회에서 하는 것”이라며 전면 폐지 가능성에 대해 직접적인 언급은 피했다.
재계 달래며 전략적 협력 관계 유지
대통령실의 이 같은 움직임은 기업 입장에서 규제 강화로 받아들여지는 정책들에 대해 오해를 불식하고 반발을 잠재우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최근 기업 이사의 충실 의무 대상을 회사 및 주주로 확대하는 내용의 상법 개정안이 공포된 가운데 노조에 대한 손해배상 범위를 제한하는 노란봉투법도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를 통과했다. 정부와 여당은 윤석열 정부에서 24%로 낮춘 법인세 최고세율도 기존 25%로 올리는 데 합의한 상태다.
이에 대한 기업들의 우려가 커지고 있지만 동시에 정부로서는 기업들과 협력 관계를 긴밀히 유지해야 하는 상황이다. 특히 미국과의 관세 협상에서도 기업은 정부의 협상력을 뒷받침할 주요 축이다. 관세 협상에서 우리 정부의 핵심 카드가 될 대규모 대미 투자의 경우 기업들의 도움이 절실하다. 이날 회의에서 이 대통령이 대선 공약이었던 국민과 기업이 함께 참여하는 ‘100조 원 규모의 국민펀드’ 조성 방안을 조속히 마련해 인공지능(AI) 등 미래 전략산업에 투자하겠다고 밝힌 것도 같은 맥락으로 풀이된다. 이 대통령은 “우리 국민 주권 정부는 실용적인 시장주의 정부가 될 것”이라며 “성장의 기회와 동력을 만들기 위해 기업 활동을 지원하고 격려하는 정부가 될 것”이라고 재차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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