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한국 정치에서는 진영 간 대화와 협치가 실종되고 적대적 대립과 혐오의 감정만이 남아 있다. 정치 실종과 정서적 양극화가 서로를 강화하는 악순환 속에서 정치는 점점 법적 절차와 사법적 판결에 의존하고 이로 인해 ‘정치의 사법화’가 구조적으로 고착화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현재 한국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만성적 병리로 작용하고 있다. 정치 갈등이 정해진 절차와 제도를 통해 조정되지 못하고 폭력이나 불법적 수단으로 표출될 경우 헌정 질서의 위기로 쉽게 비화할 수 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12·3 계엄 선포는 민주적 권한을 위임받은 정치 지도자가 갈등 조정 역량을 갖추지 못하고 제도 운영에 실패할 때 민주주의가 얼마나 급속히 위헌적 국면으로 전환될 수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였다.
조기 대선과 정권 교체를 통해 불법 계엄 사태에 대한 정치적 심판은 이뤄졌지만 극단적 정치 양극화와 정치 기능의 마비는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채 지속되고 있다. 지금의 위기를 실질적인 민주주의 회복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정치제도의 근본적 개혁과 함께 구조적 재편을 위한 숙의와 이를 제도화하려는 지속적인 노력이 필수적이다.
현재 한국 정치에서는 협치가 정치적 패배로 간주되는 대결적 정치 문화가 지배적이다. 이러한 정치 문화의 고착화는 단지 정치적 태도의 문제만이 아니라 승자독식의 ‘제왕적’ 대통령제와 소선거구 단순다수제 같은 제도적 요인에 의해 구조적으로 뒷받침되고 있다. 이들 다수결적 정치제도는 정치에 뚜렷한 승패 구도를 조장해 타협보다는 대립을 유도한다. 여기에 정치와 행정 권력이 중앙에 과도하게 집중된 수직적 권력 구조가 더해지면서 중앙 정치의 갈등은 전국으로 확산되고 정당 간 대립은 국회는 물론 지방과 시민사회 전반으로까지 번진다. 이처럼 불균형한 권력 구조는 정권 교체기마다 ‘1987년 체제’의 한계를 둘러싼 개헌과 정치 개혁 논의를 촉발시켰지만 정당 간 이해관계 충돌과 타협 실패 속에 논의만 반복될 뿐 실질적 개혁으로는 이어지지 못했다.
1987년 체제는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한 민주화의 성과였지만 동시에 불과 넉 달 만에 마련된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라는 한계도 함께 안고 있었다. 그 결과 대통령제와 내각제 요소가 혼재된 불안정한 권력 구조가 형성됐고 이후 정권마다 제왕적 대통령제에 대한 비판과 권력 충돌이 반복돼왔다. 한국은 ‘이원적 정통성’을 갖춘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지만 실제 정치 운영은 권력분립보다는 내각제적 권력융합 양상에 가까우며 여야 간 대립 구도가 정치 전반을 규정해왔다. 최근 이재명 정부 출범 과정에서도 여당 의원 다수가 입각 대상으로 거론되자 ‘사실상 내각제’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조기 대선이라는 특수성을 고려하더라도 이는 정치적 정합성과 행정 효율성 모두에서 현행 권력 구조의 한계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헌법이 규정한 권력 구조와 실제 정치 운영 방식 간의 괴리를 성찰하고 제도적 재설계를 모색해야 할 분명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 권력 구조의 내각제적 요소는 1948년 제헌헌법에서부터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당시 이승만의 대통령제 구상과 한민당·유진오 계열의 내각제 구상이 충돌하면서 양측의 정치적 절충을 통해 혼합형 정부 형태가 채택됐고 이러한 절충 방식은 1987년 헌법 개정 과정에서도 유사하게 반복됐다. 결과적으로 오늘날의 대통령제는 체계적 설계라기보다는 특정한 정치적 상황과 이해관계에 따라 형성된 역사적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처럼 타협을 통해 탄생한 권력 구조는 시간이 흐르면서 정치적 불안정성과 갈등을 야기하는 제도적 병목으로 작용해왔으며 그에 따른 경로 의존성은 이제 외면할 수 없는 구조적 과제로 남았다.
1987년 민주화 이후 40여 년이 지난 지금 경직된 정치 문화와 미비한 제도가 반복적으로 악순환을 재생산하는 불균형적 구조 속에서 한국 정치의 구조적 한계를 면밀히 진단하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실질적인 제도 설계 논의가 그 어느 때보다 요구된다. 이제는 정치적 수사를 넘어 미래 세대를 위한 지속 가능한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할 제도적 전환을 논의해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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