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성의 첫 미술계 등단 기록은 1928년 10월, 약관 16세의 나이로 세계아동예술전람회에서 개인화 부문에 ‘촌락의 풍경’으로 특선을 수상했다는 소식이다. 제대로 된 미술교육을 전혀 받지 않은 상태에서 실력을 인정받게 된 이인성은 1928년 대구화단을 이끌었던 최초의 서양화가 단체인 ‘0과회’ 회원들을 알게 됐고, 그 중 서동진이 경영하는 대구미술사에 들어가 수채화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1929년 제 8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작품 ‘그늘’로 처음 입선한 이후 1930년 ‘겨울 어느 날’로 입선, 1931년 ‘세모가경’으로 첫 특선, 1935년 ‘경주의 산곡에서’로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수상했다. 나혜석은 1932년 조선미술전람회를 비평하는 글에서 이인성의 작품 ‘카이유’를 언급하면서 “작년 출품작품과 비슷한 것으로 빽이 좋았고, 색채가 선명하며 필치가 자유스러운 좋은 작품이었다. 매년 특선됨은 경하하는 바이다”라고 상찬했다.(삼천리 제 4권 제 8호,1932년 7월 1일)
일제강점기 거의 유일한 공식등단 기회로서 조선미술전람회에서의 연이은 수상은 가난한 집안 출신인 이인성이 성공가도를 달릴 수 있게 한 기반이 됐다. 1931년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일본의 킹크레용회사에 입사했고, 이후 다이헤이요 미술학교에서 수학했다. 일본 체류시 일본 수채화연맹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일본의 대표적인 관전인 문부성 미술전람회와 제국미술원 미술전람회에서 여러 차례 입선했고, 1935년 제 22회 일본 수채화회전에서 ‘아리랑 고개’로 최고상을 받았다. 일본에서 대구 남산병원장 김재명의 딸 김옥순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녀는 패션을 전공할 만큼 당시로서는 신여성이기도 했다. 1935년 대구 공회당에서 김옥순과 결혼하기에 이르렀고 결혼 직후 이인성은 장인의 병원 3층에 이인성 양화연구소를 개설해 본격적인 활동을 펼쳐나갔다. 작품이 벽면 가득 걸린 당시의 작업실 장면은 익히 알려져 있는데 성공한 미술가로서의 자부심과 포부가 느껴진다.
1937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추천작가가 되었고, 그 무렵 대구 중구에 ‘아르스(Ars)다방’을 개업했다. Ars는 예술을 뜻하는 라틴어인데 음악감상실 겸 갤러리였기에 대구에서 활동하는 각양각색의 문화예술인들이 모이는 사랑방 역할을 하게 됐다. 1938년에는 동아일보에서 대표작 45점을 출품한 개인전을 개최했는데 수채화부와 유화부로 나눠서 진행했다. 1942년에 대구 공회당에서 제전 입선 10주년 기념 개인전을 개최하는 등 화가로서의 삶은 안정적이었으나, 그 해 부인이 사망하는 바람에 그는 실의에 빠지기 시작했다. 이인성은 1944년 두 번째 결혼 이후 1945년 서울 이화여자중등학교 미술교사로 부임하게 되면서 대구를 떠나 서울 북아현동으로 이사했다.
‘계산동 성당’은 이인성이 1930년대 대구에서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이다. 1938년 동아일보 개인전 출품작 리스트에는 게재돼 있지 않으니 그 이후 제작됐을 가능성도 매우 높다. 작업실이 있던 남산병원은 청라언덕에 위치하고 있어서 계산성당을 전체적으로 조감도 시점으로 내려다 볼 수 있었다. 지금은 인근 빌딩 숲에 가려져서 성당 건물의 웅장한 위용이 잘 드러나지 않지만 1902년 완공된 시점에서는 서울, 평양에 이어 3번째로 지어진 벽돌식 성당이자 저지대 평지에 지어져 신자들 뿐만 아니라 시민들에게도 큰 놀라움을 안겨주었다. 이인성이 화력(畵歷)을 쌓기 시작했던 1930년대 중반부터 계산동 성당에서는 1935년 대강당과 성당 정문 준공, 한국 천주교 150주년 기념행사, 1936년 교구 설정 25주년 은경축 기념행사 및 정문 십자고상 설치 등 큰 공사와 행사가 진행되었으므로 신자가 아니더라도 관심을 기울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특히 프랑스에서 들여온 스테인드글라스는 장미창을 중심으로 조선시대 천주교 박해 때 순교한 성인들의 모습을 담고 있어 미술을 공부하던 이들에게는 좋은 사례가 되었을테고, 1936년 정문에 설치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형상을 담은 십자고상 역시 문화예술인들에게 이국적인 시각경험을 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인성의 작업실이 있던 남산병원 인근에는 1899년 설립된 동산의료원과 1900년대 초부터 기독교 선교사들이 거주하던 사택들이 있었다. 오늘날 블레어 선교사 주택, 챔니스 선교사 주택, 스윗즈 선교사 주택 등이 남아있는데 그 중 1906년부터 1910년까지 건축된 스윗즈 주택은 대구읍성 철거시 버려진 성돌로 기초를 쌓고 그 위에 붉은 벽돌을 올린 기와지붕의 건축물로서, 이른바 서양과 동양의 복합양식이다. 1980년대 후반 필자의 외삼촌인 김영훈 교수가 잠시 계명대학교 의대 교환교수로 방한했을 때 선교사 사택에 기거하였는데 생활하기에 큰 어려움이 없었던 정도로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20세기 초 선교사들이 무더운 날씨를 견디기 위하여 주택 주변에 파란 담쟁이를 심었었고, 이로부터 청라(靑蘿)라는 별명이 붙어 오늘날 공식적인 지명으로 된 만큼 근대기 대구 중구 계산동과 남산동은 서양문물이 토착화하는 전초기지였다.
이인성은 20여년 가까이 청라언덕에서 본 계산동 성당을 원근법에 따라 그린 것이 아니라 성당 내 중요한 건축적 요소들을 입체적으로 재구성했다. 성당 앞 큰 나무(오늘날 이인성 감나무로 불리고 있다)를 전면에 내세우고 성당 주변의 기와집도 높이를 다르게 하여 성당 건물이 더 드러나 보이도록 했다. 첨탑과 지붕의 십자가 역시 한 눈에 들어오도록 위치를 조정한 듯 하다. 마치 금강산을 자유자재로 그렸던 겸재 정선처럼 이인성은 자신만의 기억 속에 담긴 계산동 성당을 그린 것이다.
무엇보다도 계산동 성당의 선명한 붉은색 벽돌이 인상적인데 앞서 언급했던 기독교 선교사주택들과 더불어 대구 서양식 건축물의 붉은 벽돌은 이인성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을 것으로 짐작한다. ‘계산동 성당’을 필두로 하여, 정물화와 풍경 속의 사과, ‘경주의 산곡에서’ ‘여름 실내에서’ ‘빨간 옷을 입은 소녀’ 등의 붉은 색은 대구의 무더운 여름이나 지역성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시각적으로 각인된 결과가 자연스럽게 나온 게 아닐까? 어떤 화가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닌 대표적인 색채가 있기 마련인데 향후 아마도 ‘붉은 색’을 이인성의 가장 대표적인 색채로 내세울 수 있을 것이다.
‘계산동 성당’은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청주에서 한창인 국립현대미술관 최초 수채화 컬렉션 전시 ‘수채: 물을 그리다’에 출품됐다.
★ 이인성: 1912년 대구에서 태어나 1928년 서동진이 경영하는 대구미술사에 들어가 수채화를 배우기 시작했고 세계아동예술전람회서 ‘촌락의 풍경’으로 특선을 수상했다. 1929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처음 입선한 이후 1932년까지 지속적으로 출품했고 연이어 입선을 수상했다. 1931년 일본으로 건너가 다이헤이요 미술학교에서 공부하면서 1932년 제국미술전람회에 ‘여름 어느날’로 입선했고 1935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경주의 산곡에서’로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수상했다. 1935년 대구 공회당에서 김옥순과 결혼하였고, 이인성양화연구소를 개설했다. 1937년 조선미술전람회 추천작가가 됐고 아르스다방을 개업했다. 1942년 부인 김옥순이 사망했고, 대구 공회당에서 제전 입선 10주년 개인전을 개최했다. 1944년 두 번째 결혼 이후 1945년 서울로 이사했고 이화여자중등학교 미술교사로 부임했고, 자유신문에 ‘1945년 8.15’ 연재소설 소설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1947년 이화여자대학교 서양화부에 출강했으며 세 번째 부인 김창경과 결혼했고 성북회화연구소에서 가르치기 시작했다. 1948년 자유신문사 후원으로 동화화랑에서 개인전을 개최했고 경향신문 연재소설 ‘진리의 밤’에 삽화를 그렸다. 같은 해 국화회 회화연구소를 개설해 운영했고 1949년 제 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서양화부 심사위원이 됐다. 1950년 11월 경찰이 쏜 총에 맞아 다음날 사망하였다.
▶▶필자 류지연은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 운영부장이다. 1996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로 입사해 전시기획, 미술관교육, 소장품연구, 레지던시, 서울관·청주관 건립TF 등 미술관에 관한 거의 모든 분야를 섭렵하며 29년째 미술관을 지키고 있다. 영남대 미학·미술사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영국 에식스대학교(Essex University)에서 미술관학(Gallery Studies)을 공부했으며, 서울대에서 미술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화여대 겸임교수(2022~2023)를 비롯해 인천시립미술관·대구미술관 자문위원, 서울문화재단 전시 자문위원, 예술경영지원센터 원로작가 디지털 아카이브 자문위원, 성북문화원·대안공간 공간291 자문위원, 증도 태평염전 아티스트 레지던시 심사위원 등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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